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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귀촌] 해남 18-19일 차: 분노의 아저씨들과

두륜산에서 사는 법

by NOPA

2025.09.24. 18일 차

#1. 유화, 고량주, 어둠


오늘의 체험은 유화 그리기다. 귀촌 프로그램에서 왜 그림까지 그리냐면, 그림 학원 원장님이 광주에서 해남 남자에게 시집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촌인으로 인정되어 그의 업체를 체험하는 것은 성공적으로 정착한 귀촌인 선배를 만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어떻게 귀촌 체험이냐며 아저씨들 중 한 명이 파업을 선언했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거부했고, 프로 불편러를 좋아하는 나는 그의 불편함을 응원하며 즐겁게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 온 지도 3주가 됐으니 슬슬 싸움이 벌어질 때도 됐다.


그의 분노를 형상화하여 바탕은 어둡게 분노의 불꽃은 빨갛게 대충 칠했더니 그럭저럭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역시 분노는 남의 분노여도 예술의 동력이 된다. 부처님 뒤에 배경으로 두었더니 꽤 그럴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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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축제에서 팔고 남은 묵과 고기로 잔치를 벌이는 중인데, 아저씨들이 의외로 입이 짧아 벌써 질린다며 직접 김치전을 부치고 비빔국수를 만드셨다.


역시 주변에 프로 불편러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나는 묵도 먹고 전도 먹고 국수도 먹었고 오계도 어겼다. 오늘 식탁엔 소주가 아니라 공부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망하는 눈빛으로 술을 보고 있으니 아저씨 한 분이 한 잔 드시라고 했고, 나는 오계를 지키는 중이라 안 된다면서 잔을 내밀었고, 아저씨는 에이, 그런 건 뭐, 하면서 잔을 채워주셨다.


KakaoTalk_20250924_205639521_10.jpg?type=w1 보자마자 먹어버리는 바람에 김치전 모양이 안 좋다

정말이지 그래, 그런 건 뭐,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맛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속세의 맛! 나는 왜 이 좋은 세상을 두고 해탈을 하려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두 번째, 세 번째, 아마도 네 번째 잔까지 알아서 공부가주를 따라 마셨다.


마셨으니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마시면 술집을 나와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 그것은 내 오랜 주사다.


개 두 마리가 또 신나서 따라나서길래 무섭게 쫓아버렸다. 동네 한 바퀴는 반드시 홀로 돌아야 한다. 그것이 내 오랜 원칙이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런 원칙을 세워서 지키는 중이다. 사람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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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밤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별들이 하늘의 검은 장막을 조금씩 찢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가로등도, 빨간 십자가 불도 없이 오직 별빛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순도 높은 어둠이 좋다. 고작 7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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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은 나는 마치 어둠의 일부인 양 연밭 주변을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고, 뒤에서 차들이 올 때마다 옷에 달린 검은 모자를 뒤집어써서 나를 더 까맣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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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선 이 시각에 연밭을 걷는 사람이 없으니 운전자들은 내가 산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조금 헷갈렸을 것이다. 산 사람입니다. 아직은.


오는 길에 축사에 들러 소들에게 인사를 하고 왔다. 소는 순박하고 호기심 많은 동물이다. 처음에 갔을 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전부 내게 모여들었는데, 이젠 시큰둥하다. 슬프다. 나를 다시 궁금해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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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축사에는 붉은 불이 켜진다. 미리 정육점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2025.09.25. 19일 차.

오늘은 해남에서 맥주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을 만났다. 우리가 이것저것 물어보니 중구난방으로 물어보지 말고 주제를 하나로 잡아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 말을 여러 번 하길래 그냥 이것저것 물어보면 안 되냐고 조금 짜증을 부렸더니 그제야 아무 거나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을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어떤 질문에는 오늘 하루 내내 얘기해도 모자란다며 자세히 답해주지 않았고, 어떤 질문에는 그런 건 ‘어떻게’라고 묻는 게 아니라며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아저씨들과 나는 점차 입을 다물었고, 후속 일정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냐는 멘토의 질문에도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들은 점차 불만이 쌓이는 중이고 나는 의외로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이다. 이래서 프로 불편러들이 좋다. 상대적으로 내가 무던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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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숙소 사장님의 누님과 단둘이 girl’s night을 보냈다. 처음엔 누님이 ‘아저씨들도 같이 먹게 부를까?’라고 해서 오늘은 그냥 둘이서 먹죠, 라고 했다. 여자가 귀한 곳에 있으니 여자를 독점하고 싶어진다.


누님은 생명의 손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 모든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고, 병아리도 대여섯 마리 부화시켰고, 그 손으로 만드는 모든 음식이 맛있고, 소주는 컵으로 드신다. 화끈한 누님.


그리고 누님의 어머님이 현재 두륜산 자락에서 아들과 둘이 사신다고 했다.


내가 해남 귀촌을 꿈꾼 이유가 대흥사 근처에서 살고 싶어서인데, 그곳은 땅값이 비싸고 집은 나오는 족족 진작에 채가기 때문에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어머님의 아들이 미혼이란다.


그렇단 말이지. 내가 갔다 온 지 10년이 다 돼간다는 사실을 누님께 어필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재미없는 농담이다. 결혼은 한 번만 해봐도 이것이 두 번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저 외로움에 굴복당한 인간들만이 재혼, 삼혼을 하는 것이다. 가련한 사람들.


그러니 두륜산 자락에서 살고 싶다면 대흥사에 출가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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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엊그젠 미황사 법당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데 법당 끝쪽 마루에서 흰 한복을 입은 노인이 못 들어오고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있어서 못 들어오시는 건가 싶어서 좌선을 끝내고 고개를 돌려 노인이 있는 쪽을 봤다. 그러나 그곳엔 마루도, 노인도 없었다. 그저 어떤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셔둔 벽만 있었다. 아, 귀신이구나!

대승불교와 달리 초기 불교에서는 존재가 죽으면 업에 따라 육도 중 하나의 세계로 즉시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49일간 이승을 머무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귀신’은, 육도 중 아귀 지옥에 떨어진 존재를 말한다.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말이라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고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에서 노인은 아귀 지옥에 떨어져 귀신이 됐고, 그래서 법당 안으로 못 들어오고 밖에서 서성였던 것이다. 가련한 양반, 살면서 덕 좀 쌓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육도 중 꽤 좋은 곳에 윤회한 것이다. 그러니 뭐든 고맙게 생각하며 좋게 좋게 살아야 한다.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KakaoTalk_20250924_204003109_16.jpg?type=w1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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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18033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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