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부자
2025.09.16.12일 차
#1. 친애하는 나타샤
가스총을 사놓고 한 번도 시험 발사를 안 해봐서 연밭으로 가지고 나와봤습니다. 가스총은 안 쏘고 모셔만 두면 안에서 액이 굳어버리기 때문에 한 번씩 쏴줘야 합니다.
아저씨들만 있는 이곳에 체격도 좋지 않은 비루한 몸으로 홀로 내려와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는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텐데 밤에는 가스총을 옆에 두고 자고, 낮에는 구텐탁씨를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들고 다닙니다. 뭐, 처음에는 그랬다는 얘깁니다.
사실 저도 저만 여자일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안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 알려줬나봅니다. 다행히 좋은 분들만 와 계시고(제가 제일 이상한 사람 같고), 옆 방에는 사장님 가족 분들이 거주하고 계셔서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산에서보다 외롭지 않게,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스총 시험 발사는 그것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그냥 쏴 본 거지요.
*
첫 번째는 연밭에 쐈는데 최루액 같은 것만 수증기처럼 나오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가스총 맞으면 죽을 것 같다더니, 다 뻥인가? 두 번째, 세 번째는 전봇대에 쏘고 용감하게 코를 킁킁거려 봤으나 역시 아무 냄새도 안 났습니다.
당한 건가?라고 생각할 때 바람이 살짝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최루액을 맡았을 뿐인데 나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전봇대를 붙잡고 나 죽는다고 기침을 해댔습니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에서, 오직 연잎만이 제 추태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가스총에는 카이저 소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그것은 이 총에 전혀 어울리는 이름이 아닙니다. 만일 총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코가 뚫릴 정도로 매콤한 불족을 볶아줄 것 같습니다. 이 총의 이름은 오늘부터 나타샤입니다.
친애하는 나의 나타샤 여사님.
#2. 귀촌 카페 운영의 현실
6억을 주고 건물을 지었다는 귀촌인의 카페에서 드립백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귀촌 프로그램에서 이런 걸 왜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귀촌하면 뭐 먹고 살 수 있을지 경험하게 해주는 일들입니다.
실제로 카페에서 드립백을 만들며 귀촌인의 카페 운영의 참된 실상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카페에 있는 동안 딱 두 명의 손님만 왔습니다.
아, 카페는 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고, 사장님도 누가 카페를 하겠다면 말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장님은 왜 카페를 운영하는가 했더니 돈이 많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융자 없이 지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 돈 없는 분들은 귀촌해서 카페할 꿈은 자제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커피 맛은 정말 좋습니다. 해남에 오시면 산정 카페에 꼭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2025.09.17.13일 차
#1. 시골 사람의 스케일
시골 사람의 특성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단톡방에서 숙소 사장님께 뭔가를 물어보면 잘 씹으십니다. 그래서 저도 단톡방에서 사장님이 저한테 뭔가를 말하면 씹는 중입니다. 원래 단톡방 댓글이라는 것은 품앗이 같은 것이기에 씹으면 씹히는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어제 사장님께 감을 하나 받았습니다. 나무에서 새파란 땡감을 하나 따더니 먹으라고 줬습니다. 사장님은 이미 그 퍼런 감을 무섭게 씹어먹고 계셨습니다. 감을 보며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결투인가?
저녁에 사람들을 불러 전어를 굽고 껍데기를 볶아 대접하시는 걸 보면 결투 신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시골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일단 그들은 스케일이 큽니다. 껍데기를 가스통에 연결해 끓이는 걸 본 일이 없고, 이 정도의 쪽파와 이거 두 배 정도되는 열무를, 저녁 식사 전에 다듬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분들은 이 많은 양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씻고 썰고 다듬습니다. 숙소 사람들이 가볍게 도와주려고 왔다가 다라이의 크기를 보고 아저씨 두 분은 숙소로 돌아가 장화로 갈아 신고 다시 왔습니다. 아저씨들은 왜 고무장화를 가지고 다니는 걸까요? 그것도 신기했습니다.
아무튼 요리를 진두지휘하시는 사장님의 누님은 이 엄청난 양을 보고도 성에 안 차 이번에는 열무를 너무 조금했다고 푸념하셨고, 그 푸념을 들은 사장님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또 열무를 사러 나갔습니다.
사장님도 스케일이 크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펜션을 전부 혼자 지었습니다. 독채 4채와 본채 한 동, 카페, 야외 식당, 작은 독서 공간 등, 만4천 평 대지에 있는 모든 건물이 사장님의 손에서 나왔니다. 아무리 건축 일에 잔뼈가 굵다고 하지만, 이게 대체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인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 남다른 시골 부자
무엇보다 시골에는 부자가 많습니다. 벤츠가 상할까 봐 현장일을 할 땐 트럭을 쓰는 사람은 돈이 좀 없는 사람이고, 진짜 부자들은 벤츠 S클래스(벤츠 시리즈 중 가장 비싼 것) 트렁크에 그냥 농기구 싣고 다닙니다. 이 깡촌에 마이바흐를 모는 사람도 있습니다.
논 5천 평 이런 건 땅이 아니라고 합니다. 최소 만 평은 돼야 먹고 살만하하다고 했습니다. 농사를 직접 짓지도 않습니다. 때 되면 드론 업자한테 전화해서 농약 치게 하고, 또 때 되면 인력 사무소에 전화해서 추수히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한 서른 명 정도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부들이 아침부터 와서 모를 심고, 배추를 땁니다. 일당은 보통 12~15만 원 선. 13만원만 잡아도 하루 인건비가 4백 정도 듭니다. 이곳에서 며칠 지내면 서울 부자라는 것들은 좀 추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3. 헌법 위에 시골법
아, 음주운전도 매우 많이 합니다. 시골은 헌법 위에 시골법이라는 게 있어서 마을 전체가 다른 원리로 돌아갑니다.
또 여자 혼자 지내기에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하면서 우리 동네 노인정은 남자 노인정과 여자 노인정이 따로 돼 있다고 합니다. 성범죄 사고가 났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여자 혼자 지내기에 위험하진 않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 빈집이나 봐주면서 월세 걱정, 생활비 걱정 없이 소박하게 살면서 글을 쓰려고 했건만 그런 건 외지인에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프라이버시는 없고, 부자는 넘쳐나고, 차 없이는 돌아다닐 수 없는데 돌아다니는 많은 차들은 술에 취해 있는, 어떤 행위가 범죄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그런 곳이 시골이라는 것을 배우는 중입니다.
야생적인 매력이 넘쳐나는 곳입니다만 저는 그 매력을 즐길만큼 강하지 않은 듯합니다. 지금 생활은 꽤나 재밌습니다만 군에서 마련해준 거처와 사람의 울타리를 벗어나도 재밌을까? 라는 의문은 듭니다. 아마 곤란한 일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집 앞만 나가도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경의 고요함은 정말 오래도록 누리고 싶습니다. 일단 두 달은 다 살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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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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