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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귀촌] 해남 36-39일 차 : 마흔의 추태

전우들의 귀환과 괄약근의 활약

by NOPA


2025.10.10 ~ 10.13


#1. 해남 36일 차 : 전우들의 복귀

10일 즈음 아저씨들이 우루루 복귀했다. 나도 내가 이분들의 귀환을 이토록 반길 줄은 몰랐다.


아저씨들이 하나씩 들고 온 치킨과 수육과 포도와 김치를 먹으며 그동안 홀로 겪은 서러움을 와르르 토해냈다. 어허, 거참, 하면서 은근하게 욕을 해줬다. 역시 전우애는 욕하면서 단단해딘다.

KakaoTalk_20251014_210557284_10.jpg?type=w1 수육과 포도가 빠졌다. 맛있어서 먹느라 못 찍었다.


한 분은 아내와 함께 올라왔는데, 내놓는 음식마다 정말 맛이 좋았다. 그러고보니 남편되는 아저씨가 묘하게 위풍당당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3일 후면 댁으로 올라간다. 아저씨는 다시 쪼그라들 것이다. 장년 남성에게 아내란 그런 존재다.


그러나 바로 옆의 아저씨를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아저씨는 아내의 지배에서 해방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무슨 수퍼에서 초코바를 산 이야기까지 흥에 겨워 늘어놓았다. 눈엔 광채가 돌고 얼굴에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자 반사적으로 기립해 받더니 한쪽에서 받는다는 게 몇 걸음 못가 넘어지고 말았다. 장년 남성에게 아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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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남 37일 차 : 시골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은?

시골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돈이 아니다. 똑똑하고 힘 좋고 운동 잘하고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시골에선 요리 잘하는 사람이 최고다.


아저씨 중 두 명이 요리를 제법 잘하고, 그중 한 명은 아주 잘한다.


제법 잘하는 아저씨가 새벽부터 갯벌에 나가 사투를 벌이며 게를 잡았고, 아주 잘하는 아저씨도 같은 시간에 갯벌에서 톳을 캤다. 둘은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새벽부터 뻘밭에 나가 음식 재료를 캤다. 요리 잘하는 사람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보다.


그렇게 캐온 재료로 해물 라면을 끓일 거라고 단톡방에 공지했고, 요리를 못해 잉여 인간이 된 나와 다른 아저씨가 어슬렁거리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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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잡은 게로 국물을 낸 라면과 죽. 정말 맛있었다

생긴건 대단치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배탈이 나서 국물만 조금 먹으려고 한 사람이 죽까지 한 사발 다 비우게 하는 그런 맛이었다.


대체 임시 숙소에 마른 황태 채와 건새우가 왜 있는 건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고 느끼면서도 배울 생각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얻어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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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남 39일 차 : 버스킹과 괄약근의 활약

식탐의 업보로 배탈이 악화됐고, 죽으로 속을 달래는 대신 모히토와 샌드위치를 먹었더니(프로그램 과정에서 나온 거라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위장이 그만 처먹으라고 격하게 화를 내며 그 뭐더라, 네 항문에 사보타주, 그걸 했다.


장염에 걸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제 화장실에 서른 번은 간 것 같다.


그 와중에 아저씨들을 따라 귀촌 체류 센터 구경을 갔고, 저녁에는 마을 버스킹에 참여해 짧은 글쓰기 강의와 에세이 낭독까지 했다. 심지어 나의 명문장에 감격해 지가 쓴 글 읽고 지가 우는, 최후의 추태까지 부렸다.


그 정도로 나는 내 괄약근을 믿었고, 녀석은 가동 가능한 모든 기력을 동원해 여차하면 벌어질 수 있었을 참극을 막았다. 그러나 괄약근이 이번 한 번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제부터 종일 금식했더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괄약근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내 쪽에서도 이 만큼은 해줘야겠지.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괄약근뿐이다.

KakaoTalk_20251014_210557284_07.jpg?type=w1 참사의 원흉인 모히토와 계란 샌드위치. 안 먹을 수가 없었다고..


벌써 10월도 절반이 갔다. 다음주 주말이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쉬울까봐 추석에도 안 올라간 건데, 역시 아쉽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353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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