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7. 복귀 2일 차
#1. 시골살이 후유증
내 책상에 다시 앉게 돼 좋았다. 허리가 덜 아픈 의자와 졸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리클라이너, 그리고 높이가 조절되는 책상과 눈이 시원한 모니터까지. 편리함의 결정체들.
부엌도 다시 만나서 정말 좋았다. 오븐과 에스프레스 머신과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를 갖고 있는 나의 아름다운 녹색 부엌.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와 오븐에 구운 치즈 치아바타를 먹을 땐 이것이 문명의 맛이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공사 소리와 차 소리와 윗집 애 녀석 뛰어다니는 소리,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숨 막히는 빌딩 숲.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좀 걷기 위해 산책로로 나왔을 땐 그 같잖음에 눈물이 나왔다. 백 미터도 안 되는 병 든 나무들 사이를 햄스터처럼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 끝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진상은 나무에 매달려 가지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시골이었으면 아이고 어르신, 괜찮으세요? 하고 당장 달려갔을 나는, 썩을 인간이 애먼 나무는 왜 부러뜨려서 저 사달이냐며 진저리를 치며 지나갔다.
도시의 나는 차갑기 그지없고, 도시인들은 조금씩 미쳐있다. 한편으론 순하기 이를 데 없어 풀도 없고 바다도 없는 이 삭막한 환경을 박차고 떠나지 않고 꾸역꾸역 견딘다. 그래서 다들 미쳐있는 것이다.
조금도 순하지 않은 나는 고작 이틀 만에 도시 생활에 진저리가 쳐져 집안에 해남 존을 만들어 우울함을 달래려 했으나… 그 광활한 산과 바다가 고작 이까짓 것으로 달래질 리 없다.
#2. 이런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간다
귀촌 프로그램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나 같은 반골들이었다. 남들은 어떻게든 도시에 안착해 편하게 노후를 보내려고 할 때 그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내려온 사람들. 이런 유사성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이 유독 즐거웠다.
우리가 도시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유도 대체로 비슷했다. 누구는 고통스럽게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누구는 하루아침에 아내를 잃었고, 누구는 가까운 이에게 상처받았고, 나는 자신을 떠나보내려 했고...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했던 것, 그것은 상실이다.
물론 시골에 간다고 상실감이 짠하고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한히 걸을 수 있고, 걸을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있고, 걷다 보면 내 빈 곳이 바람과 물과 초록으로 채워지는 것 같고,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별 것 아닌 듯 느껴진다. 엄청난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작게 만드는 그 거대함이 좋았다. 내 모든 고통을 하찮게 만드는 그 장엄함이.
아저씨들은 농담인 양 낄낄거리며 “그때 혼자 섬에 들어가서 엉엉 울었잖아”라고 말했다. 혹은 “얘는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울잖아”라고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낄낄거리며 “저는 몇 년 전에 차도에 뛰어들었잖아요”라고 말했다.
여기에도 규칙은 있다. 말하는 사람만 낄낄거리고 듣는 사람은 웃지 않기. 그리고 더는 캐묻지 않기.
웃는 이유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기 위해서.
웃지 않는 이유는 별 것 아닌 게 아님을 알아서.
#3. 상실하지 않은 것
나는 프로그램 전체 일정보다 일주일 먼저 숙소를 떠났다. 왜 이렇게 빨리 올라가냐는 질문에 “추석에도 안 갔는데 더 늦게 가면 엄마 난리 나요”라고 했더니 아저씨 한 분이 “좋겠다”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이 중에 엄마가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순간 내게 아직 상실되지 않은 것이 퍼뜩 깨달아졌다. 엄청나게 소중한, 나의 가족.
가족을 또 하나 만들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인 듯하다. 정확히는 만들었다가 없애버린 거지만. 나는 나보다 앞서 떠나는 가족에 대한 상실감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딱 부모님까지만 견뎌야지.
#4. 엄마
작별 선물로 통제광 아저씨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과청을 한 병씩 만들어 줬다. 엄마가 그 만듦새의 섬세함을 보더니 모과를 이렇게 잘게 써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이 양반은 몇 살이냐고, 결혼은 했냐며 호구조사를 시작하길래 그 양반 연세가 나보다 엄마 쪽에 가깝다고 하니 더는 묻지 않으셨다. 아빠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계셔서 연하를 소개시켜 드릴 수도 없었다.
이런 말장난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다 업고 해남으로 내려가야지. 왠지 시골에선 오래오래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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