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도착하니 내가 가야 할 곳이 숙소 뒤로 까만 병풍처럼 보였다. 흑석산. 까만 돌의 산. 이름도 근사하기 이를 데 없는 너를 오래전부터 오르고 싶었지.
죽을 뻔했다.
북한산 문수봉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닌데, 흑석산에 비하면 문수봉의 힘듦은 서울놈들의 엄살이나 다름없었다. 곳곳에 표지판이 있어 혼자 가도 길을 잃을 일이 없고, 암벽이 험하긴 하지만 발 받침대와 철 손잡이가 촘촘하게 설치돼 있어 실족하기도 쉽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흑석산은 등산객의 안전 따윈 개의치 않는 듯다. 쫄리면 꺼지시던지, 느낌으로 직벽 아래 밧줄 하나 툭 던져 놓았다든지, 3m도 넘는 맨질맨질한 암벽에 엄지발가락만 겨우 갖다 댈 수 있는 홀드 몇 개만 박혀 있다든지 하는 식이다.
딱히 이승에 집착하는 편은 아닌데, 흑석산을 오르며 처음으로 불경을 왰다. 이 정도로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단전에서부터 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그러나 죽고 사는 일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허무하게도 발이 낙엽에 쭈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양 무릎으로 바닥을 찍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뭐 하나 부러져 있었을 것이다. 척추나 뭐 그런 것.
요단강에 발을 담갔다 뺀 것 같은 아찔함이 전신을 훑었고, 함께 가던 산악회 사람들도 비명을 질렀다. 그 사람들, 밧줄 없는 절벽도 맨 손으로 오르는 사람들이라 웬만한 일은 별스럽지 않을텐데, 이건 그들에게도 별스러웠나보다.
집에 와서 보니 무릎이 조금 깨져 있었는데, 머리가 깨지는 것보다 무릎이 깨지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산에서 미끄러질 땐 반드시 무릎을 바닥에 깨트리자.
그러나 '까만 돌들의 산'은 무릎을 바쳐도 아쉽지 않을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어디서도 본 적없는 검은 웅장함.
흑석산 너머로 아스라히 펼쳐진 산세를 함께 보며 아무리 수묵화가 아름다워도 결코 자연을 따라잡을 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가들은 괴롭겠다, 어떻게 해도 자연에 미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릴 수밖에 없으니.
괜찮아요, 어차피 사람들 산에 안 와.
사진 역시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의 반의 반도 담지 못한다. 어림도 없지. 그래서 직접 오르는 것이다. 나 혼자 좋은 것 보려고.
*
요단강 여파도 있고 산행도 늦게 시작하여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하산했다. 오후 3시엔 반드시 하산한다,가 나의 유일한 등산 원칙이다.
그래서 통제광 아저씨한테 무지하게 잔소리를 들었다. 해남에 온 이후로 픽업부터 식사까지, 계속 민폐를 끼치고 있어서 등산만큼은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하산ㅏ하자마자 픽업 요청 문자를 날렸다. 시골은 버스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 위험하다는데 왜 갔냐부터 시작해 무진장 잔소리를 쏟아내는 와중에도 탄산음료부터 생수, 따뜻한 차까지, 종류별로 완벽하게 준비해서 픽업을 오셨다.
어제 저녁은 삼겹살과 오뎅탕, 오늘 아침은 떡만둣국, 오늘 저녁은 삼계탕과 닭죽을 주셨다. 고작 장 한 번 봐온 거로 나 혼자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송구하여 친구를 데리고 와서 함께 대접받았다.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사람이면 두 번은 안 올 거라고 하셨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2월쯤 또 올 계획을 세웠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침부터 계란을 흰자, 노른자로 분리해 지단을 준비하시는 것을 보면 통제광 선생님도 우리가 그리 싫진 않은 것 같다.
세상엔 이런 사람이 다 있고, 이런 산도 다 있구나, 하는 것을 해남에 올 때마다 느낀다. 그러니 또 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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