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해남 여행의 시작은 대흥사 템플스테이였다.
템플스테이는 언젠가부터 평민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가의 상품이 됐는데(보통 1박에 8만 원), 1년에 두 번 정도, 단돈 3만 원에 모시는 기간이 있다. 11월이 그 기간임을 알고 놓칠 수 없다며 부랴부랴 해남행을 준비한 것이다.
다만 4인 1실을 써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나는 가족들과도 한집에서 못 사는 사람인데, 그래서 혈육과 헤어지기 위해 일찍 결혼했고, 남편과 헤어지기 위해 이혼도 했는데. 그런데 생판 모르는 사람과 한방을 써야 한다니….
고민이 됐지만 어차피 출가를 하려면 단체 생활은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템플스테이를 내가 출가를 할 만한 깜냥이 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는 테스트배드로 삼기로 했다.
고작 하루지만, 모르는 여자 세 명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아침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고작 사흘을 지켜봤지만 내게 심각한 인간관계 문제가 있음을 간파한 통제광 아저씨가 가서 사람들하고 싸우지 말고 두 개씩 나눠 먹으라며 초콜릿을 여덟 개를 챙겨 주셨다.
그걸 왜 그 사람들한테 주느냐고 성질을 부리면서도 나는 역시 해남 어머니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3일 동안 내게 여덟 끼의 끼니를 차려준 그를 나는 해남 어머니로 여기기로 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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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머니의 염려를 뒤로하고 심호흡을 하며 들어간 대흥사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가 넘어가도록 누구 하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늘 그랬다.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일부러 구경하려고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도 언제나 나 혼자였고, 제주도 게하는 8인실을 예약했는데도 나밖에 없었다. 나는 아마 감방을 가도 독방을 쓸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산사에서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기로 했다. 끈나시에 타이즈 입고 스쿼트 160번 하기.
스쿼트를 하니 열이 뻗쳐서 밤 산책을 나가자며 문을 열었다가 3초 만에 조용히 다시 닫았다. 한밤중 산이 내뿜는 기운은 백포리 저수지 따위에 비길 게 아니어서 문을 여는 순간 온 몸이 두려움으로 꽉 차버렸기 때문이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모든 어둠 속에 귀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기가 센 편인데도 이건 못 이긴다고 직감했고, 버티지 않고 바로 물러났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편이라 후퇴가 빠르다. 대체 스님들은 어떻게 산속 암자에 혼자 사는 거지? 이불을 꽁꽁 말아 누워 나도 그런 기존쎄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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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50분. 겨우 눈을 떠서 고양이 세수만 하고 새벽 예불에 참석했다. 예불 시작 전에 스님이 사물, 즉 목어와 북, 징과 종을 차례로 울리는데, 마치 거대한 산사 공연장에 온 듯했다.
특히 북소리는 중생들 심장을 다 울릴 것처럼 굉장했는데 DJ DJ Pump this party(김대중 선생님, 김대중 선생님, 우리 당을 일으켜주세요) 소리가 절로 나왔고 넋을 놓고 보느라 촬영을 못했다. 원통하다.
예불엔 주지스님과 젊은 스님 셋, 노보살과 나, 그리고 뒤늦게 온 절 직원과 그의 여친이 참여했다.
기독교에서 노래 파트는 성가대원이 분담한다면, 절에서는 주지스님이 목탁치고 불경 외고 혼자 다 하신다.
일흔은 훌쩍 넘은 노스님이 단련된 코어로 절을 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한 권은 족히 되는 경전을 한 시간 동안 암송하는 걸 보고 있으면 경이롭다. 거의 5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새벽을 보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할머니 신자들의 지극한 존경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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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이 끝나고 스님과 신자들이 다 빠져나간 후 드디어 법당을 독차지했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해남까지 템플스테이를 온 것이다. 법당에 홀로 앉아 호흡 명상을 하기 위하여.
이건 정말 너무나 귀한 기회라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호흡에 머물려고 했으나 그러기엔 지난 사흘간 너무 재미지게 놀았고, 그래서 온갖 잡념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정신을 못 차리게 추웠다.
11월 말 산사의 새벽은 한기가 내장까지 파고들 정도로 추워서 숨을 내쉴 때마다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절에서 얼어죽는 것은 영광인가 민폐인가를 생각하다가 일단 살고 보자며 바들바들 떨며 법당을 나오는데 댓돌 위에 내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게 보였다. 분명 댓돌 아래 대충 벗어놓고 들어왔는데. 누가 이렇게 신발을 정리해줬을까? 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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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해남 여행은 너무 재밌어서 눈 한 번 딱 감았다 떴더니 4박 5일이 홀랑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그 즐거움 지분의 상당 부분을 해남 어머니가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친엄마도 3일 내내 세 끼를 차려주진 못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통제광 아저씨와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가 느끼하지 않아서”라고 답했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통제광은 자신이 얼마나 느끼한 사람인지 아냐며 격하게 반발했다. 안 그러면 우리가 또 올까 봐.
그러나 선생님이 느끼한 사람이었으면 내가 끼니마다 어머니 밥 좀 주십쇼 하고 못 갔겠지.
잠시 그의 아침상을 소개해 보자면, 꼴뚜기 젓갈은 편마늘과 고추를 썰어서 양념을 다 다시 했고, 계란찜에는 버섯과 청양고추가 들어가 있고, 계란말이에는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가 있고, 미역국은 닭고기 삶은 육수로 맛을 냈고, 미역 초무침도 너무 맛있다.
칼럼을 써야 된다고 하면 먹으면서 하라고 포도와 사과를 씻어서 배달해 주신다. 미안해서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그것도 못하게 한다.
이러니 내가 법당에 있는 돌부처가 아니라 숙소에 있는 생불한테 보시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한국의 대표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집안 어딘가에 쑤셔 놓고 나왔더니 사람이 인정으로 한 일을 돈으로 거래를 하는 거냐며 난리 난리 생 난리를 쳐서 이거 어머니 아니고 마구니구나, 하며 도로 받았다.
마구니가 준 돈은 함부로 쓰면 탈이 나는 법이므로 다음번 고깃값으로 쟁여둬야겠다. 밥 좀 주십쇼 하고 문 두드리면 진저리를 치면서 또 한 상 뚝딱 차려주시겠지.
어머니와 마구니 사이. 생불이기도 하고 통제광이기도 한 선생님 덕분에 마흔 살인 나는 열두살 어린이처럼 무구하게 놀다가 왔습니다. 성불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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