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귀촌] 해남 51일 차. 공공의 적과 통제광

그냥 통제광은 아니고 선량한 통제광

by NOPA


2025.10.25


#1. 정신이 병든 인간과 글쓰기

몸이 병든 동물만이 약을 먹듯이 정신이 병든 인간만이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허튼소리, 하면서 콧방귀를 뀌었는데, 사실이었다.


거의 열흘간 다이내믹 내 인생에 온전히 집중하다보니 글 같은 건 쓸 여력이 없었다. 근래 가장 정신이 맑고 왕성한 상태였던 것 같다. 쓰지 않아도 즐거웠으니까.


그러나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노트북을 열어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너무너무 쓰고 싶은 것을 보니 벌써부터 정신이 병들기 시작했나 보다.


글 쓰는 것도 잊을만큼 열흘간 나를 즐겁게 한 것은 인간이었다. 아, 인간들. 세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것도 인간이고, 가장 웃긴 것도 인간이다. 인간에게서 얻는 기쁨과 분노와 희열과 적의가 한데 모여 나의 즐거움을 만든다. 아, 즐거운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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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동의 적의 유익함

해남의 머무는 마지막 보름간 숙소는 귀촌 참여자 vs 숙소 사장의 구도로 명확하게 양분다. 공동의 적은 내부를 결속시키고 없던 전우애도 생기게 하는 법이어서 우리 다섯 외지인들은 적의 압제에 맞서 함께 먹고 함께 욕하고 함께 움직였다.


서로 다른 개성의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적이라는 존재는 꽤나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이 우리를 함부로 대할수록 우리 안의 분노는 오로지 그를 향해서만 뻗어나가니 내부적으로 불화가 생길 틈이 없었다.


나 역시 숙소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럽다’라는 평가는 상대가 선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울 때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 선인들은 오히려 나를 작아지게 만들고, 무엇보다 지루하다.


우리는 다 늙고 못생겼고, 다들 하나씩 모난 구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지점들이 유쾌하게 얽혀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지루하지 않았다. 그럴 때 만족스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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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10분 전에 나와 있어 정각에 나오는 나를 지각쟁이로 만들었던 그들. 아저씨들은 절대 늦지 않는다. 그리고 할말 많았던 숙소.

#3. 선량한 통제광

그중 가장 압도적인 개성은 ‘선량한 통제광’이다. 그는 아저씨들 가운데 가장 막내고(그래봤자 50대 중반이지만),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요리를 잘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두달 살이가 이렇게 만족스럽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우리를 자주 걷어 먹였고, 우리를 대신 가장 많이 일했다. 그런 그의 한가지 모난 구석은 잔소리다. 그는 잔소리가 무지하게 심했다.


한 번은 그와 큰 형님과 내가 함께 장날 읍내에 나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용무를 보고 30분 후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가 가장 먼저 왔고(당연한 일이다), 그 다음에 내가 왔다.


그런데 생선을 보러 간 큰형님이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그와 함께 형님을 찾으러 시장으로 향했다. 갈림길이 나오자 그는 자신이 좌측으로 갈 테니 나더러 우측으로 가서 시장 안쪽에서 만나자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우측으로 안 가고 포도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포도를 보자 포도를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버렸고 나는 원체 말을 안 듣는 편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포도를 보며 값을 흥정하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왜 형님을 안 찾고 거기 있냐고, 빨리 아까 헤어진 그쪽으로 다시 오라고 했다.


통제. 그것이 그의 잔소리의 이유다. 그는 상황이 자신의 통제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조금 미친다.


당연히 그를 다시 만나자마자 엄청나게 잔소리를 들었다. 한 귀로 흘렸다. 큰 형님도 무지하게 잔소리를 들었다. 형님도 한 귀로 흘렸다. 왜냐하면 큰 형님은 원하는 생선을 샀고, 나는 원하는 포도를 사서 우리는 둘 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오직 통제광만이 큰형님과 막내가 말을 안 들어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냐며 잔소리를 했다. 큰 형님은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63세) 길을 잃겠냐고 했고, 나는 나대로 내가 마흔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든 말든 통제광은 우리가 사온 생선과 포도를 나르고 운전을 하고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우면서도 잔소리를 했다. 왜냐하면 잔소리는 그의 삶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통제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잔소리를 퍼부으며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IMG%EF%BC%BF2596.jpg?type=w1 굽고 끓이고 하는 것들은 당연하다는 듯 먼저 하신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는 라면 하나를 끓여도 건새우와 마른 황태로 국물을 내어 우리를 초대하고, 햅쌀로 밥을 짓고, 가지를 산처럼 튀겨내고, 내가 피드백을 쓰느라 식사에 참석을 못하면 방으로 음식을 배달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사람이 선량한지, 누가 그를 보며 오늘은 소갈머리가 더 벗겨진 것 같다고 해맑게 말하고(그는 정수리가 좀 비었다), 누군가는 그래도 주변머리는 풍성하지 않냐고 말하고, 나는 배꼽을 잡고 바닥을 구르는 데도 그는 우리중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질서와 통제 안에 들어와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맛나게 잘 먹고 있으면 그는 행복해지는 듯했다. 내가 대머리였으면 그날로 연쇄살인마가 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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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통제광 선생님 덕분에 터미널까지 편하게 왔고, 창틀에서 5일 동안 고이 숙성시킨 홍시와 초콜릿도 잔뜩 받았다. 참으로 선량한 통제광이다.


농담처럼 쓰긴 했는데, 실로 고마우신 분이다. 그분의 선량함을 보며 인간 혐오가 많이 치유됐다. 감사합니다 통제광님!(참고로 그도 자신의 별명이 선량한 통제광임을 안다.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웃기긴 한데, 통제광만큼 압도적이지 않아서 그만 써야겠다.


KakaoTalk_20251025_131757709_03.jpg?type=w1 완도에서 본 일출


그리고 이것은 두 달 간의 해남 살이를 정리한 칼럼.

https://cms.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67


잘 지내고 갑니다.

사랑해요,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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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41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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