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봉-문수봉-형제봉 능선
오늘도 북한산에 갔다. 색다른 길을 가보고 싶었는데, 백운대 코스를 ‘보통’이라고 써놓고, 의상능선 코스를 ‘매우 어려움’이라고 쓴 것을 보니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올라가 봤다.
진입로에 들어선지 십분 만에 사족 보행을 하면서 내가 왜 일요일 아침부터 네 발로 바위 위를 기어오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보통은 지금껏 온 길이 아까워 돌아가지 못하는 지점에서 템포를 올려주는데, 시작부터 미니 암벽을 던져주면 십 분 만에 돌아가는 게 머쓱하게 느껴져서 그냥 직진하게 된다.
직진한 김에 문수봉까지 쭉 가기로 했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갖은 추태를 보이며 바위산을 네 발로 오르다 보면 끝까지 가고 만다, 하는 독기가 생긴다.
고양이를 만났고, 곧 죽을 것처럼 헐떡대면서도 "쉬운 편은 아닌데?"라고 말하는 허세남을 지나쳤고, 험한 곳에서 길을 잠시 잃었다가 중년 여성에게 구원 받았고, 어제 태워먹은 파이와 베트남 커피를 먹고 다시 껄떡 껄떡 바위를 오르다 보니 문수봉이었다.
그러는 사이 의상봉과 용출봉과 용혈봉, 증취봉과 나한봉을 지났다. 정말 “매우 어려움” 능선이었다. 그러나 문수봉에 오르는 순간, 이 풍경을 쉽게 봐선 안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뱀 같은 도로는 빛으로 넘쳐 흘렀고, 엄지손가락만 한 남산타워와 그보다 조금 더 큰 롯데월드타워, 그리고 천만 명의 삶이 저 아래 있었다. 그 작은 것들을 보는 나는 세속에 속한 사람 같지 않았다. 여기는 사바세계가 아닌 게 분명하다.
*
문수봉을 내려가면서 나는 정말 짱이라고, 일요일 아침부터 의상 능선을 완주한 나는 정말 킹왕짱이라고 생각하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걷는데, 대남문에서 휴식 중이던 한 초로의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뭔가 싶어 가봤더니 당신은 다 드셨다며 사과와 도너츠를 먹으라고 주셨다. 진짜 짱이었다.
하도 굽신거리며 인사를 한 탓에 원래 가려고 했던 문수사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다시 돌아가서 아저씨 얼굴을 보는 게 쑥스러워 그냥 직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성문으로 가서 일선사에 들렀다가 형제봉까지 오르고 하산했다. 점심시간 30분 포함 총 7시간 걸렸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선 후 다시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였다.
보통은 다음날부터 다리가 아픈데, 지하철에 타는 순간부터 다리가 아팠고 지금은 덜덜 떨린다.
이제 나는 의상능선을 탄 사람이 됐다. 일반인과는 급이 다르다. 능선 안 타본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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