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쓸모 없는 것들이 인간을 구원하지

by NOPA


어제 반포도서관 수업이 끝났다. 나도 남들처럼 수업 전부터 홍보하면 딱 좋겠으나 작년부터 스토커가 한 명 꼬여서 엄두도 못 낸다. 보아라, 네가 내 생계를 어떻게 틀어막고 있는지. 상놈 새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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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서관을 갈 때마다 그 지역 분위기를 살펴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인데, 강남 3구의 핵심인 서초구 주민들은 많이 배우셨고, 점잖으셨고, 너무 점잖아서 웃을 때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처음엔 밀폐된 무균실에서 수업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껏 소음에 민감하게 군 내 생애를 돌아보며 참회했고, 앞으로 시끄럽다고 화내지 않을 테니 제발 우리 선생님들 웃을 때만이라도 소리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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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만나 먹은 것들과 세기말 노래방


엊그젠 나보다 강의 경력이 백 배쯤 많은 언니를 만났다. 수강생들이 침묵을 즐기는 성향일 땐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는지 물었다.


정답은, 섣불리 개그를 치지 않는다! 개그 욕심을 못 이기고 썩은 개그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면, 재빨리 허허허 웃고 바로 다음 ppt로 넘어간다!


역시 관록은 무시 못하는 법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혼자 개그치고 혼자 웃는 강사들을 몇몇 봤었다. 그땐 저 사람 뭐냐고, 왜 혼자 썩은 개그치고 혼자 웃냐고 황당해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이야말로 강철 멘탈을 가진 프로페셔널 강사였다. 나도 그런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어야지.


일단 소음이 그리웠던 나는 언니와 코인노래방에 가서 하여가를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음을 만들었다. 하여가는 열두 살 이후 지금까지 나의 18번이고, 내 선곡은 Y2K 세기말시기에 멈춰 있으며, 언니는 어떻게 노래가 20세기 이후로는 업데이트가 안 돼 있냐고 놀라워했다.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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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지막 수업을 하기 전, 나의 첫 문장 문우 중 네 분이나 오셔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중 한 분이 비즈로 직접 만든 반지를 한 보따리 풀더니 열 개씩 집어가라고 하셨고, 나는 탐욕스럽게 8개의 반지를 손가락에 꿰었다. 마치 비즈로 만든 너클 같았다. 반짝이는 너클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고 나는 그 손가락 그대로 강의실로 들어가 수업을 했다.


결과는 완벽했다. 수강생분들도 내 반지가 너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오늘은 질문마다 응답을 해주셨고 웃음도 소리 내어 웃어주셨다.


역시 문제 해결엔 너클만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유쾌하게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KakaoTalk_20251120_113633252_08.jpg?type=w1 복잡한 세상사 너클로 해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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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수업을 듣는 네 명의 언니들과 ‘쓸모없음’에 관해 얘기를 나눴는데, 쓸모없는 글쓰기야말로 우리의 밋밋한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동력이었고, 기쁨이었다.


마흔이 넘은 우리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글을 쓰며 여전히 뭔가를 꿈꿨고, 자신을 좀더 이해하게 됐고, 삶을 기록하고 타인과 소통했다.



특히 한 무더기의 비즈 반지는 쓸모없음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는데, 그 쓸모 없는 물건은 우리 다섯 여자를 거의 광란의 기쁨으로 몰아넣었다. 그것들을 손에 끼었다가 놓았다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 인간을 구하는 건 쓸모없는 것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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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쓸모 없는 것을 낀 손으로 쓸모 없는 소설을 넘기며 지극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 모든 쓸모 없는 행위가 나를 살아있게 했다.


내가 오랫동안 마음이 메말라 있던 것도 아마 쓸모 있는 것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녔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십 대엔 시답잖은 것들만 쫓아다녀야지.

하등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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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78077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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