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문학관 : 해남] 30일차. 60대 여자는 어떻게 노나.
20260330
#1. 나의 작가님
2주 전에 할머니 작가 한 분이 오셨다. 굉장히 말씀이 많으셨다. 언제 등단하셨냐고 여쭈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국어 선생님을 만나 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부터 말씀하는 식이었다.
반세기 동안 시골에서 비참한 시집살이를 하여 한도 많았다. 여쭈지 않아도 한 맺힌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래서 열심히 도망 다녔다. 그런데 도망 다닌 곳마다 작가님이 계셨다. 숙명이구나. 체념하고 귓구멍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이 풀은 뭐고, 저 풀은 뭐냐고 물었다. 농부 출신인 작가님은 내게 먹을 수 있는 풀과 먹을 수 없는 풀을 알려주셨고, 어떤 구멍이 뱀 나오는 구멍인지, 맨발 걷기는 어디서 하는 게 좋은지도 알려주셨다.
속이 안 좋을 땐 미역국을 끓여주셨고, 얻어먹기가 미안해 설거지를 하면 뒤에서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고 앉아서 “아이고, 설거지를 해서 어떻게”하며 입으로만 안타까워하셨다. 하나도 안 미웠다.
#2. 마당을 나온 암탉
작가님 몸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큰 종양이 있는데, 그 몸으로 버스를 7시간이나 타고 이 먼 길을 달려오셨다고 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도 아니고. 손에는 트렁크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갈 때는 차 있는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안심했더니 연락이 안 된단다. 여차하면 엉망진창 운전 실력으로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려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상황을 알아보려고 저녁에 야채 볶음을 같이 먹자고 문자를 보냈다가 작가님과 친구분, 두 분이 식사하는 자리에 눈치 없이 끼게 됐다.
다행히 40대 친구에게는 영 시원찮던 쑥밥이 60대 언니들에겐 극찬을 받았고, 야채볶음은 세대 초월 모두의 원픽이었다.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나의 야채볶음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다.
디저트로 수제 요거트를 먹던 중에 할머니 작가님이 “나 여기 와서 진짜 행복했어”라고 하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반세기 가까이 행복을 모르고 산 인생이었다. 이곳에서의 행복을 뒤로 하고 내일 문학관을 나서면 시골의 요양원으로 다시 입원하셔야 한다.
#3. 두려워할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래서 오늘 저녁에 다짜고짜 불러서는 컴퓨터가 왜 안 되는지 알려달라고 할 때도 군말 없이 컴퓨터를 붙잡고 한참을 앉아 씨름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한 건 작가님이었지만.
작가님이 컴퓨터에 매달리는 동안 나는 작가님 친구분과 기독교와 하나님과 예수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목사 사모님이라 40년 동안 성경 공부를 하셨다. 오늘 혼자 해변을 걸으면서 불현듯 “아무것도 두려워할 건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모님이 갑자기 똑같은 말을 하셔서 무척 놀랐다.
어느 순간 나는 이불이 깔린 뜨끈한 방바닥에 반쯤 드러누워 있었고, 조금은 몽롱한 상태로 어머니뻘 되는 두 여성의 각기 다른 열정과 그 열정이 63년 동안 빚어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개성 있고 아름다운 얼굴들이었다. 이 순간이 무척 좋았고 내가 바로 이런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여기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맨발 걷기가 제일 좋았던 이유
얼마 전엔 친구가 다녀갔다. 친구에게 목포와 송호 해변과 땅끝마을과 완도를 보여줬다. 송호해변에서 함께 맨발로 걸은 게 가장 좋았다고 했다. 나의 불꽃 같은 운전 실력을 바로 옆에서 직관했으니 맨발로 걷는 게 가장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그러나 친구는 아주 좋은 사람이어서 너무너무 편하게 다녔다며 여행 내내 나를 잘 먹였고, 마지막 날엔 나의 드미뜨리까지 만땅으로 먹이고 떠났다.
그렇게 고마운 친구는 엊그제 갔고, 귀여운 작가님은 내일 간다. 내일이면 이곳의 모두가 떠나고 나만 남는다. 그리고 저녁에는 낯선 사람들이 다시 방을 채울 것이다. 이젠 사람들에게 정을 좀 덜 줘야겠다. 벌써 난 자리가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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