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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등에 불 (2)

집 싸게 팝니다. 수압 좋아요. 물이 콸콸콸

by 션록홈즈


"엄마! 내 까만 가위 못 봤어??"


아이의 물음에 며칠째 묵묵부답하는 중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날카로운 까만 가위는 현관문 앞 신발장에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워있기 때문이다. 벌써 일주일은 된 것 같다. 가위를 신발장에 놓은 바로 그날, 집이 나갔다는 어떤 이의 블로그 글을 보고 신랑과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천주교 신자라는 사실마저도 잠시 접어두고) 가위를 신발장에 갖다 놓았다. 젠장. 가위까지 놨는데 왜 안 나가는 거야, 이놈의 집구석.


가까운 지인 중 한 명이 또다시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유명한 맛집에서 쓰는 가위를 가지고 와야 집이 팔린다던데요?" 맙소사. 이제는 절도까지 하란 말이야? 깔깔깔 웃으며 이 말을 신랑에게 전했고, 신랑은 껄껄껄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뭔가 쎄 한 기운이 흐른 건 기분 탓이겠지..


며칠 후 우리는 우연히 유명한 냉면집에 들렀고, 직원이 냉면 가위를 테이블에 놓고 가는 순간 신랑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가위 좀 빌려갈까?" 신랑의 말에 나는 빵 터져 한참을 웃었다. 진짜.. 이 정도로 간절한 거냐 우리?


그랬다. 우리는 간절했다. 냉면집의 가위를 훔칠까 잠시 고민을 할 만큼 간절했다. 집은 우리를 그만큼 놓아주지 않았고, 우리는 사랑했던 이 집에 학을 뗐다. 그러다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연인 사이에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는 것만큼 최악의 매너가 없다던데.. 나는 이 집에게 문자는커녕 일말의 의논도 없이 이별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집은 아직 우리 가족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년간 이 집에서 행복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딱히 생각나지 않는 순간들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집에 사는 내내 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고 많이 행복했으며 많이 안락했고 많이 많이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주었다. 네 식구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집의 역할이 컸다. 늘 우리를 보듬어주고 안아주었던 집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말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미안하고 고마웠다.


집의 한 켠에는 아이들의 키를 쟀던 흔적이 있다. 첫째가 6살이던 시절부터 10살이 되기까지, 둘째가 3살이던 시절부터 7살이 되기까지.. 우리는 아이들의 키를 주기적으로 벽에 표시했고, 그 벽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고 흔적이 되었다. 삐뚤빼뚤 아이들 글씨로 가득 찬 벽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우리 아이들이 이 집에서 한 뼘 반이 크는 동안 변함없이 함께 해주어서..



집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나는 신발장에서 가위를 꺼내, 아이의 연필꽂이에 가위를 돌려놓았다. 집도 우리도 충분한 준비가 된 후에 인연의 끈이 자연스레 놓아질 거라 믿기로 했다.


약 30번 정도 집 구경을 시켜주고 나니, 우리 가족은 어느새 집 보여주기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은 착착착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는 물건들은 당근을 통해 처분하기도 했다.


푸르르던 창 밖의 녹음이 울긋불긋 조금씩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10월의 어느 날, 드디어 우리 집의 새 주인이 나타났다. 50대 후반의 그녀는, 이 집을 마음에 꼭 들어했고 나는 그녀에게 투 머치 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한 인포메이션을 공유했다. 이 집의 수압이 얼마나 좋은지, 콸콸콸 변기 물이 얼마나 잘 내려 가는지, 4계절 내내 창 밖 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등등.. 아름다우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로 이 집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집이 내 손을 놓아주기까지 약 10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0일 동안 30여 팀이 이 집을 보러 다녀갔고, 나는 30번이 넘게 집을 청소하고 가꿨다. 내 집이어서가 아니라 남의 집이 되도록..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집아. 지난 4년간 이 집에 살면서 좋은 일이 무성했고, 무엇보다도 다정한 이웃들을 사귈 수 있어서 행복했어. 그간 우리 네 식구 따뜻하게 맞아주고 매일 포근하게 감싸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4번 지나도록 변함없이 든든하게 함께 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가위로 싹둑 자르지 않아도, 우리의 연은 서서히 정리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 것이 지난 세월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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