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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록홈즈 Oct 29. 2021

발등에 불 (2)

집 싸게 팝니다. 수압 좋아요. 물이 콸콸콸


"엄마! 내 까만 가위 못 봤어??"


아이의 물음에 며칠째 묵묵부답하는 중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날카로운 까만 가위는 현관문 앞 신발장에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워있기 때문이다. 벌써 일주일은 된 것 같다. 가위를 신발장에 놓은 바로 그날, 집이 나갔다는 어떤 이의 블로그 글을 보고 신랑과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천주교 신자라는 사실마저도 잠시 접어두고) 가위를 신발장에 갖다 놓았다. 젠장. 가위까지 놨는데 왜 안 나가는 거야, 이놈의 집구석.


가까운 지인 중 한 명이 또다시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유명한 맛집에서 쓰는 가위를 가지고 와야 집이 팔린다던데요?" 맙소사. 이제는 절도까지 하란 말이야? 깔깔깔 웃으며 이 말을 신랑에게 전했고, 신랑은 껄껄껄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뭔가 쎄 한 기운이 흐른 건 기분 탓이겠지..


며칠 후 우리는 우연히 유명한 냉면집에 들렀고, 직원이 냉면 가위를 테이블에 놓고 가는 순간 신랑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가위 좀 빌려갈까?" 신랑의 말에 나는 빵 터져 한참을 웃었다. 진짜.. 이 정도로 간절한 거냐 우리?


그랬다. 우리는 간절했다. 냉면집의 가위를 훔칠까 잠시 고민을 할 만큼 간절했다. 집은 우리를 그만큼 놓아주지 않았고, 우리는 사랑했던 이 집에 학을 뗐다. 그러다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랑했던 연인 사이에 문자로 이별을 통보하는 것만큼 최악의 매너가 없다던데.. 나는 이 집에게 문자는커녕 일말의 의논도 없이 이별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집은 아직 우리 가족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4년간 이 집에서 행복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딱히 생각나지 않는 순간들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집에 사는 내내 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고 많이 행복했으며 많이 안락했고 많이 많이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주었다. 네 식구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집의 역할이 컸다. 늘 우리를 보듬어주고 안아주었던 집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말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미안하고 고마웠다.


집의 한 켠에는 아이들의 키를 쟀던 흔적이 있다. 첫째가 6살이던 시절부터 10살이 되기까지, 둘째가 3살이던 시절부터 7살이 되기까지.. 우리는 아이들의 키를 주기적으로 벽에 표시했고, 그 벽은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고 흔적이 되었다. 삐뚤빼뚤 아이들 글씨로 가득 찬 벽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우리 아이들이 이 집에서 한 뼘 반이 크는 동안 변함없이 함께 해주어서..



집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흐를 정도였다. 나는 신발장에서 가위를 꺼내, 아이의 연필꽂이에 가위를 돌려놓았다. 집도 우리도 충분한 준비가 된 후에 인연의 끈이 자연스레 놓아질 거라 믿기로 했다.


약 30번 정도 집 구경을 시켜주고 나니, 우리 가족은 어느새 집 보여주기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널브러져 있던 물건들은 착착착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는 물건들은 당근을 통해 처분하기도 했다.


푸르르던  밖의 녹음이 울긋불긋 조금씩 단풍이 들기 시작하던 10월의 어느 , 드디어 우리 집의  주인이 나타났다. 50 후반의 그녀는,  집을 마음에  들어했고 나는 그녀에게  머치 까지는 아니지만 적당한 인포메이션을 공유했다.  집의 수압이 얼마나 좋은지, 콸콸콸 변기 물이 얼마나  내려 가는지, 4계절 내내   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등등.. 아름다우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로 이 집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집이 내 손을 놓아주기까지 약 100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0일 동안 30여 팀이 이 집을 보러 다녀갔고, 나는 30번이 넘게 집을 청소하고 가꿨다. 내 집이어서가 아니라 남의 집이 되도록..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집아. 지난 4년간 이 집에 살면서 좋은 일이 무성했고, 무엇보다도 다정한 이웃들을 사귈 수 있어서 행복했어. 그간 우리 네 식구 따뜻하게 맞아주고 매일 포근하게 감싸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4번 지나도록 변함없이 든든하게 함께 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가위로 싹둑 자르지 않아도, 우리의 연은 서서히 정리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 것이 지난 세월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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