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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골책방 Oct 26. 2019

"당신의 신발끈을 묶어 드릴게요"

사랑한다는 말 대신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는 동안 

 사랑은 이런 것.

 아니

 이럴 수는 없는 것.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을 한 번에 할 수도 있구나, 그랬다.

 

제목에서

주인공이 당연히 ‘한아’일 것으로 짐작했고 

하나로 해석될 것이 당연한 설정임에도

뻔~하지 않았다.

외계인과의 사랑이라니!

온갖 과학적 증명이 넘쳐나는 21세기에

얼토당토않은 사랑 얘기에 몰입한 내가 어이없었지만

도저히 읽기가 멈추어지지 않았다.

불면증이 생겨난 이후부터

잠자기 전에는 책을 읽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건만

정해둔 취침 시간을 한참 넘기고 말았으니

나에게는 분명 특별한 책으로 남았다.   


       

한아는 지구인으로

‘환생-지구를 사랑하는 옷가게’에서 옷수선을 하며 살고 있다. 

버려질 뻔하다가 다시 발견된 물건들로 가득한 환생의 주인이다.

     

경민이라는 이름으로 한아 앞에 나타난 외계생명체는 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이라고 한다. 3천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별의 시민들에게만 주어지는 자유 여행권을 한아의 본디 남자친구였던 사람경민의 몸과 맞바꾸었다.          

 

사랑은 우주를 건너서도 찾아갈 수 있는 것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사랑은 모습 따위는 중요치 않은 것

경민은 잠깐 망설였지만, 오래 망설이진 않았다. 양손으로 턱을 누르자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한아의 눈앞에 대고 턱을 떨어뜨렸다. 턱이 끝없이 떨어졌다. 가만히 두면 배꼽까지 떨어질 것 같았지만 가슴께에서 멈췄다. 경민의 몸속에서 약간의 수증기와 함께 은은한 초록불이 흘러나왔다. 한아가 몸을 일으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딸꾹.”

한아는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그 안에 있었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 버렸다.     


사랑은 깨닫기도 전에 먼저 시작되는 것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사랑은 오로지 너만 특별해지는 것

“아니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건……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지구인은 아주 많다고. 환경주의자들이 지구에 그래도 5억은 살고 있지 않겠어? 그 사람들과 나는 다를 게 없는데 왜 하필 나야?”

“그 생각, 나도 했지. 그래서 억지로 수십억 다른 지구인들을 관찰해봤는데도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 미적인 기준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인간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게 안 느껴져. 근데 너만……  너만 아름다웠어. 빛났어. 눈부셨어.”     


사랑은 영원이 되기도 하는 것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심장이 마지막 걸음을 할 때, 경민이 속삭였다,

다시, 다시, 다시 태어나줘.          

     

사랑은……

나에게도 사랑은 아름다웠다. 잠깐 잊고 있었을 뿐.

24년 전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20년을 함께 살았다.     


책과는 달리

20년을 함께 사는 동안 

어디 사랑이 예쁘기만 했던가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악을 쓰며 싸우기도 했고

숨 쉬는 소리조차 미운 순간도 있었으며

아이구 내 팔자야가 절로 뱉어지는 순간도 있었더랬다.     


그런데 요사이는

반백 살을 앞둔 남편을 생각하면

수북해진 흰머리와

깊어진 이마 주름과

쳐진 눈꺼풀과

벌어진 잇몸과

볼록해진 뱃살과 

상대적으로 가늘어진 볼품없는 하체가

눈에 밟힌다. 마음이 콕콕 쑤시다.  

   

거울을 대신해 남편을 통해 나를 본다.

사람꽃도 한때구나,

세월 참 금방이다, 싶다.     


나에게 몹시 특별했던 한 남자는 이제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이가 들었으며

특별한 것 없는 일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잊고 있던 마음을 꺼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마음먹고 보니

나는 여전히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중이다.     


파란 하늘을 먹구름이 덮어 회색이 되었다고 해서

하늘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사랑은 색깔을 달리하더라도 여전히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분홍 편지지에 하트를 그리고

“사랑해”라고 썼던 옛날의 연애편지처럼

책 속의 한아와 경민을 만난 뒤

달달한 고백편지를 써보려 한다.    

 

“당신의 신발끈을 묶어 드릴게요.”라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보내는 이 말의 뜻을 

남편은 알아챌까


신발끈을 묶어주려면

넘어져서 다칠까 염려하는 마음과 함께

나를 낮춰야 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것임을.  

   


어쩌면 오늘 사랑하고 사는 우리들도

2만 광년을 건너 만난 한아와 경민처럼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인끼리 사랑하는 것이라

환생 전의 생을 기억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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