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담배
독일로 떠나는 날, 그 날 아침은 비가 갑자기 내렸고 또 억수로 내렸다. 배웅 나온 친구들의 우산은 있으나마나... 자켓도 운동화도 흠뻑 젖었다. 23kg 빡빡히 채운 검정색 이민가방을 끌고 가느라 우산 들 손이 없는 나는 이미 젖어 있었고, 멋있게 떠나는 모습을 연출하기엔 이미 글른 상태였다. 머리도 옷도 가방도 다 젖은 나의 불쌍함에 이미 한 친구는 울고 있었고, 그 모습에 그런 내 모습이 불쌍해 나도 울었다. 그 자리에서 가장 냉정했던 친구는 리무진 공항버스에 올라타는 나에게 하늘색 USB를 줬다. 아프지마 하면서... 나는 공항으로 가는내내 주머니에 넣은 USB를 만지며 펑펑 울었다.
유난히 하리보젤리처럼 말랑말랑 했던 USB의 감촉이 출국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인디음악 스무곡과 인디영화 하나가 나의 유학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인디영화 <커피와 담배>가...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학기 중에는 식당에서 주말 알바를 했는데, 오후 3시부터 저녁 12시까지 홀청소를 시작으로 음료정리, 화장실 청소, 설거지, 재료손질, 그릇세팅, 웨이트리스, 다시 설거지, 주방청소, 빈병정리, 쓰레기 버리기, 다시 홀청소까지 ..집에 도착하는 1시면 바로 쓰러졌다. 주말마다 9시간 알바가 익숙해지자 집에 도착하는 1시에는 잠보다 배가 고팠다. 컵라면에 물을 붓는게 가장 간단하면서 호화스런 식사였다. 5유로 주고 산 컵라면이니깐. (그 때 나의 시급도 5유로였다)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는 컵라면을 먹는동안 나를 혼밥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의리있는 친구였다. 커피잔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홀짝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라면은 잘 익었어? 오늘은 손님들이 많았니? 팁은 얼마나 받았어? 오늘 주방에선 실수하지 않았니? 국물까지 다 마시면서 보는 <커피와 담배>는 그렇게 나의 새벽1시에 조우하는 동지였다. 가끔 맥주도 동참하기도 했지만..
얼마 전에 온라인 책방을 운영하는 책벗에게 책 한권을 추천받았다. 제목이 <커피와 담배>인 에세이집. 오랜만에 듣는 다섯글자에 비오던 출국 날, 울던 친구들, 말랑말랑 USB 그리고 맥주까지 생각이 났다. 책벗은 10권을 10명이상의 작가들이 끝말잇기로 집필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4권까지 출판 됐다고.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 그리고 <시와 산책>. 나는 네 권을 주문했고 목요일 오후에 도착한 책들을 그 다음 날 새벽까지 다 읽어버렸다. 이 끝말잇기로 이어지는 책들이 짐 자무쉬 감독의 연출처럼 옴니버스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어쩌면 착각이 들었기 때문에)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각 책마다 작가들은 제목과 관련된 일화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조차도 포기할 수 없었던 커피. 남자에게 한 눈에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건 담배피는 자세였다는 이야기. 수년간 핀 담배를 멈추게된 (작가는 담배를 끊는게 아니라 멈추는거라고 말함)계기. 어느 순간 영화 줄거리를 줄여서 말하는게 어려운 일이 됐다는 변명?. 긴 시를 읽지 않지만 그래도 시를 사랑하는 작가. 걷는걸 좋아하지만 자꾸 넘어지는 이야기와 다시 걷기위해 힘쓰는 이야기.
모두 책 네권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옴니버스처럼 각자의 플롯을 지녔지만 또 연결고리를 만들어 하나로 만드는 것처럼 책 네권이 그렇게 읽혔다. 비가 내리던 출국날. 말랑말랑한 USB. 컵라면. 새벽1시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