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검처럼 피아노 치기 3화
피아노 레슨실이 있던 3층엔 비슷한 규모의 작업실이 여럿 있었다. 고요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대략 열 개 정도는 될까? 어릴 적 다니던 상가 피아노 학원이 떠올랐다. 정문을 들어서면 중앙 거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펼쳐져 있었더랬지. 차이점이라면 피아노 학원은 모든 벽에 큰 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복도에서도 모든 방 안이 보였지만 이곳은 방음 부스처럼 시야와 소음이 모두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포도송이를 채워야 하는 자들과 자신만의 포도를 만들어야 하는 자들의 차이랄까?
모 밴드의 초창기 키보드 주자로 본인을 소개한 선생님은 이후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레슨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아티스트의 건반 레코딩 작업도 하는데 알고 보니 올해 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된 곡에 EP 연주자로 참여하셨더라. 무엇보다 교회 반주자로 활동한 경험이 풍부하신데 (현재는 그곳을 잠시 쉬고 있다고 하셨지만) 그 이력은 내게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 내가 맡은 역할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첫 수업은 김범수의 '보고 싶다'로 시작하려고 해요
선생님은 오선지가 그러진 노트에 코드를 적으며 말했다.
발라드의 스탠더드 곡이라 할 수 있는데, 반주 시 알아야 할 요소들이 많지요.
제 커리큘럼에서 항상 처음으로 다루는 곡입니다
'보고 싶다', 잘 알다 마다.
이 노래가 뇌리에 박힌 계기가 있는데 때는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머리를 자르러 어느 쇼핑몰 안에 있는 현지 미용실을 찾았다. 말이 안 통하니 짧은 커트를 한 배우 사진을 보여줬는데 아마도 브래드 피트였던 것 같다. 덜도 말고 무난하게만 잘라주길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는데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더라. 이 노래, '보고 싶다'였다. 재밌는 건 가사가 한국말이 아니라 현지 타갈로그어였던 점이다. 익숙한 멜로디가 불안에 휩싸인 나를 위로해 주었던 음악으로 기억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3c_9byGhLo
수업은 선생님이 마디별 1~2개의 코드를 적으면 그에 맞는 3화음을 오선지에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도 교회 반주를 하고 있다 보니 어찌어찌 1절을 완성했다. 뒤이어 4비트로 연주해 보라고 하시더라. 어려울 것 없이 일정 패턴으로 코드만 바꾸면 되는 건데 괜히 긴장되었다. 연주를 마친 내게 두 가지 코멘트를 하셨다.
1. 왼손 반주를 좀 더 심플하게 가도 좋습니다.
곡이 후렴으로 갈수록 왼손이 바빠지는데 드럼이나 베이스가 연주하듯 4비트 사이로 음을 추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곡을 고조시키기 의한 의도였는데 교회 반주를 피아노 홀로 하다 보니 곡을 채우려는 습관이 과하게 들렸나 보다. 대안으로 코드의 으뜸음 옥타브를 엄지와 약지로 동시에 누르는 방법과 아르페지오를 적절히 섞어보라고 제안하셨다. 연습해 보다가 왼손이 예전 습관을 보이려 할 때면 잠시 건반에서 분리시켜 허공에서 연주하도록 조치했다.
2. 보이싱 음역대를 탑노트에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오른손 보이싱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만. 첫 번째 코멘트가 왼손 관련이고 두 번째가 오른손이면, 양손 다 문제였네?)
나 같은 경우 3화음 코드를 잡아야 할 때 가장 높은음인 탑노트를 노래 멜로디에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후렴으로 갈수록 두드러졌는데, 그러기보단 피아노 건반 중앙에 위치한 가온 도 음역대에서 연주해 보라고 하셨다. 이 또한 교회 반주 습관이 묻어 나온 것이, 청중들이 음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멜로디를 포함하여 코드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소화 가능한 코드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담백하게 표현하는 게 핵심이었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매번 시간이 부족하고 조급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님이 알려준 보이싱은 내가 알고 있는 세븐 코드음과는 다른 소리를 내더라. 흥미로웠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을 기분이란! 이 낯선 사운드가 익숙한 날이 올 때까지 찬찬히 연습해 보련다.
그나저나 박보검은 '보고 싶다' 를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노래까지 한다. 정말 잘한다.
https://youtu.be/Z1GgTmaFexQ?si=tdFNjCV0FWKlbVbt&t=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