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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줄리어드 Oct 25. 2019

청바지와 환상의 울타리

-클라라 마리아 바구스의 <봄을 찾아 떠난 남자>를 읽다-

2년 전 몸짱이 된다고 마음 먹고 몸을 만들었을 때 오로지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늘씬한 다리로 청바지를 입는 것. 나는 어렸을 적부터 청바지는 다리 라인이 쭉 벋은 사람만이 입는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이미연이나 심은하를 비롯 티비 속 연예인들이 학다리로 청바지를 입은 모습, 그 쭉 뻗은 다리가 그렇게 예뻐보였다. 그게 내가 내린 '옷태가 좋다'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로망이었기에 숏다리, 롱허리인 내가 청바지를 입으면 그야말로 어글리해보였다. 짧고 굵은 하체에다 긴 허리, 이 선천적인 체형 조건은 청바지를 소화하기엔 최악의 두 가지 조합이었다. 날씬한 다리로 청바지 입는 게 평생 한이 되었는지, 그 때 미친 듯이 몸을 만들고 날씬한 다리로 청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요즘 운동이 예전보다 게을러지고 하체에 있던 근육들 자리를 지방이 다시 차지하면서 청바지를 입기 두려워졌다. 날씬한 다리를 유지했던 그 때 그 몸이 아니기에 나는 충분히 청바지를 입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청바지는 남녀노소, 체형에 무관하게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만든 초대중적인 옷 아닌가? 이렇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청바지를 입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환상의 울타리에 나를 가두어버렸다. 


요 며칠 청바지 말고 또 하나의 망상의 울타리를 치려 하고 있다. '글 쓸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울타리. 이 세상에 인생이 소설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세상에 글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그 울타리 안에 나는 나의 가치로운 인생을 구겨 집어넣고 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을 쓴 이슬아와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를 쓴 조안 앤더슨의 필력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글이라는 걸 쓰기가 두려웠다. <일간 글쓰는노라>를 날마다 발행하기로 선포하기가 무섭게 이 두 책들을 읽고 나니 도저히 노트북 자체를 켤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잠으로 도망쳤다. '그냥 잠이나 자자. 뭘 쓰긴 쓰나. 그들처럼 쓸 수도 없는데.' 생각하면서 잠으로 나를 자학하고 아프게 하면서. 


그러다 변해있는 나를 발견한다. 안 써서 그런 걸까? 글쓰기로 털어내지 않아 그럴까? 일간 에세이를 발행한다면서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의욕적이었던 내게 또 무기력함이 삶 전반에 스멀스멀 올라와 있다. 설거지는 쌓아 놓고 음식은 시켜먹고 어젯밤엔 폭식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그리고 내 자신을 향한 비난과 분노가 아이들에게 '화'로 흘러갔다.  


마음이 아파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봄을 찾아 떠난 남자'에 미친 듯이 붙여 놓은 띠지 중 한 페이지를 펴고 다시 한 번 몇 번이고 읽어본다. 

"실제로는 전경도 배경도 없다. 우리는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것을 전경에 가져다놓고, 이 시점에서 무의미해 보이는 다른 모든 것은 배경으로 내몰지. 의미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평가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평가는 관찰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비교는 사물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방해할 뿐이다. 비교와 평가를 하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우리의 평가와 상관없이 세상 모든 것은 그만의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클라라 마리아 바구스, 봄을 찾아 떠난 남자, p.110-


안 써도 좋다. 써야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거 아니다. 청바지? 안 입어도 좋다. 예쁜 치마도 얼마나 많은데... 다만 다리라인이 끝내주지 않다고 해서 청바지 입기를 거부하고, 필력이 대단하지 않아서 글쓰는 것을 포기하는 나를 마주하는 게 아프다. '나는 청바지를 입을 가치가 없는 사람, 나는 글을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내 자신을 여겨버리기 때문이다. 청바지를 입을 권리가 없고 글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보통 사람에겐 통하는 정의가 왜 나 자신 한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피아노를 배우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엄마, 나, 피아니스트 조성진 때문에 피아노를 도저히 칠 수가 없어. 내가 아무리 쳐도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 자녀에게 어떻게 답할 것이가? "너는 아무리 쳐도 그 사람처럼 되지 못하니 때려치워!"라고 할 것인가? 아니잖아. 자녀에게 들려주고픈 나의 대답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될 것이다. 나는 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답을 알면서도 헤매는 게 인생이다. 


이렇게 쓰고 또 한 번 토해 내면서 내가 혼자 만들어 나 스스로를 가둔 환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이렇게 써냄으로써만이 없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나아간다. 내가 가장 사모하는 한 구절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면서.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
-사무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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