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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줄리어드 Dec 23. 2019

누구를 위한 수치심인가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을 읽다-

"어제 사랑이 무대에 왜 안 올라갔어?"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랑이 친구 엄마가 야속하다. 엄마인 내가 속상한 줄 몰라서 저런 질문을 하나? 때로는 호기심 어린 질문도 타인에게는 생각하기조차도 싫은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얼마 전 딸아이가 유치원 재롱 잔치에 엄마, 아빠를 불러 놓고는 부끄럽다며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내 딸 하나만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속상하고 창피했다. 나만 실패한 엄마 같았다. 모처럼 신랑도 휴가를 내고 처음으로 함께 재롱 잔치이건만 무대에 올라가지는 않고 아래에서 울고만 있는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화살표는 나 자신에게 돌아간다.


아이들이 평소에 보이지 않던 행동 양상을 보일 때 작동하는 내 감정 버튼이 돌아간다. 자동 죄책감 인식 버튼.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워서 저럴까?'


평소 아이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럴 때면 티브이에 나오는 가수에 빙의된 듯 딱 무대 체질이다. 그런데도 일상에 지친 나는 그런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지 못했다. '아이의 재능에 엄마인 내가 제대로 반응해주지 못해서일까?'


동생이 태어나고는 구박하는 횟수가 잦았다. '너무 자주 혼내서 아이가 주눅이 들었나?'


몸놀림이 유연하고 동작에 생기가 있어 작년 재롱 잔치에는 어찌나 빛나고 튀었는지 유치원 선생님들과 학부형들이 모두 사랑이를 칭찬했다. 사랑이 정말 잘하더라고. 아이가 인정받으니 나도 우쭐했다. 내가 잘 키워서 아이가 잘한 양 힘든 육아 기간을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년엔 그랬던 아이가 올해 너무 스트레스받았나? 두 오빠와 남동생이 있는 정글에서 살아남으려고, 부모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애쓴 스트레스가 이렇게 출현된 건가?' 오만 해석을 다 해본다.


아무리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려 해도 내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그 이후로 아이를 들들 볶았다. "책임성 없는 행동이었다, 너가 맡은 리듬 합주 파트를 빠지면 어떡하냐, 다른 친구들한테 피해를 주는 행동이다." 라는 말을 아이가 듣기 싫을 정도로 여러 번 반복했다. 책임성에 대해 훈육해야 하지만 내 방법은 옳지 않았다. 다시는 유치원 행사에 엄마, 아빠 부르지 말라고, 불러도 안 간다고 모진 말도 서슴지 않고 했다.


일요일 오후에 막둥이가 낮잠을 잘 때마다 꿀 같은 휴일 독서 시간을 갖고 싶어 딸아이에게는 항상 티브이를 보여줬었다.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거 하자고 자식 내팽개치는 게 삶을 회피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항상 책 보다 삶이라고 설파하고 다니는 나 아니었나. 작정하고 딸하고 놀았다. 아이클레이도 같이 하고, 그림도 그렸다.


아이가 피아노를 쳐달라고 했다. 신이 주신 달란트 가운데 나는 절대 음감을 가졌다. 음악을 들으면 그게 어떤 멜로디든 바로 피아노로 칠 수 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든 멜로디로 쳐내는 엄마를 신기해하고 좋아한다. 피아노를 집에 들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진 게 손에 꼽을 정도다. 고작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가서 땅을 파고 달란트를 감추어 둔 것과 나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나도 절대 음감이라는 달란트를 땅에 묻고 그 동안 흐르는 시간 속에 썩히고 말았다.


딸은 신이 났다. 눈부시게 웃으며 내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춘다. 얼마 전 무대에 올라가기 부끄럽다며 무대 아래에서 엉엉 울던 딸이 맞나 싶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렇게 그저 혼자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 


엄마와 함께 노래하고 율동하는 순간을 행복해하는 딸을 바라보며 무대에 오르지 않은 아이를 혼냈던 순간들이 생각나 무색하다. 부모로서의 수치심을 아이에게 전이시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 내가 느낀 수치심이 딸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해서 딸의 감정은 하나도 살피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느낀 수치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수치심인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같이 놀아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딸아이는 관객와 조명과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람인 엄마와의 시간이 필요했다.


달란트를 쓰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른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음을 시인한다. 내 삶을 어떤 멜로디로 써 내려갈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다. 오늘도 아이들이 오면 아이들이 원하는 어떤 곡이든 피아노로 쳐 줘야지. 그리고 모두 다 같이 노래를 불러야지. 그 멜로디가 아이들의 영혼에 깊이 울려 퍼지도록.


아이와 함께 '시인의 감성과 시민의 감각을 지니고 시시한 일상을 잘 가꾸며 사는 사람'으로 커 나가고 싶어요. 무엇보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심보다 요리나 청소 같은 삶의 작은 단위부터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p.157) -시인 서한영교의 말, <태도의 말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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