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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줄리어드 Dec 06. 2019

우리가 피해자라고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다

지난 주에 만난 어떤 엄마들이 육아가 '서비스'라는 표현을 썼다.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서비스를 하니까 피곤한 거라고. 그 단어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귀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과연 육아는 서비스인가? 


서비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본다. 

서비스 (service):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 -보리국어사전-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일방적인 느낌이고 서글퍼진다. 나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 분은 '육아'란 말, 쓰지도 말라고 하셨다. 누가 누구를 키우냐고. "그냥 아이와 같이 사는 거지."라면서. 



어제 감정코칭 수업에 갔다 엄마들이 육아를 서비스라고 표현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어제 내 모습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가정의 주중 아침 일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둘째는 신랑이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8시경 출근한다. 그러면 나는 여섯 살 셋째와 세 살 넷째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겨 9시 10분경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목요일 아침에는 이른 9시 30분에 감정코칭 수업이 시작되니 서둘러야 한다. 



우리 집 넷째 아들은 셋째 누나의 따라쟁이이다. 남매를 둔 여느 가정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누나가 치마를 입으니 자기도 치마를 입혀달라 그러고, 치마를 입혀줬더니 입혀주기가 무섭게 바로 벗기란다. 감정의 지속시간이 짧고 정서표현변화가 매우 급격한, 정서가 불안정한 유아기의 전형적인 정서 발달 특징이다. 누나가 목걸이를 하니 자기도 목걸이를 채워 달란다. 그런데 목걸이 두 개가 엉켜 있다. 아이 둘을 후딱 보내고 수업에 곧장 가야 하는 시간에 이 엉킨 목걸이를 풀고 있다가는 늦을 게 뻔하다. 목걸이는 어린이집 가서 하라고 엉킨 목걸이를 가방에 집어 넣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넷째가 운다. 지금 당장 엉킨 목걸이를 풀어 목에 걸어 달라는 거다.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 좀 하라고! 엄마 늦는다고! 나가야 한다고!" 결국 내가 언성을 높이고 버럭 화를 내고 난 후, 그때서야 넷째는 엄마에게 여러 가지 요구하기를 멈추고 울면서 집을 나섰다.  



그렇게 아이 둘을 보내고 운전해서 가는데 '내가 왜 그랬지?' 생각부터 든다. 나와 남의 감정을 헤아리는 수업을 들으러 가는 사람이 수업에 늦기 싫어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거다. 아이의 감정을 잘 헤아려 주기 위해 (목적) 배우러 다니는데 (수단) 수단을 목적보다 소중히 여겨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수업에 늦을 걸 왜 아이를 잡았지? 뭐가 우선인 거지? 수업 이딴 거 들으러 다니면 뭐해? 삶을 잘 살아야지?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뒤엉켜 있다 불편한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불쾌한 감정을 유발했던 일화를 적고 그 때 느낀 감정을 감정카드에서 뽑아 보라고 했다. 나는 수업에 오기 바로 전 상황을 골랐고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을 차근히 생각했다. '분노'라는 2차 감정으로 폭발시키고 말았지만 아이에게 화를 냈던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1차 감정들이 숨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수업에 늦을까봐 조마조마했고 불안했고 걱정이 됐다. 아이가 목걸이를 풀어달라는 게 귀찮았다. 짜증도 났고. 이걸 풀어줄 수도 없고 안 풀어줄 수도 없어 곤란함을 느꼈다. 그래서 아이에게 화도 났고 아침마다 이러는 아이가 밉고 싫었다. 왜 신랑은 다소 편한 큰 아이들만 등교시키고 힘든 두 아이를 내가 매일 등원시켜야 하는지 괴롭고 힘들고 지겹게 느껴졌다. 하루 정도는 신랑이 얘네들도 감당해줄 수 있지 않나? 신랑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감정들을 느꼈음에도 내 감정 상태를 아이에게 차분히 표현하지 않고 화로 폭발시켜 버린 거다.  

어제 아침 느낀 불쾌한 감정들, 화내는 행동 속에 숨겨진 1차 감정들

아이들을 보내고 운전하고 가면서도 수업에 있으면서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마음이 아팠다. 

화낸 후 들었던 감정들

나는 남이 말한 '육아는 서비스다'라는 표현에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어제 아침에 느낀 불쾌한 감정들의 깊은 내면에는 아이들에게 내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걸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어제 수업을 통해 알았는데 '아이들은 가해자이고 나는 피해자'라는 생각이 아이들을 양육할 때 많은 엄마들의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 욕구와 필요를 채워줄 때 불편한 감정들이 든다는 거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데 니가 나한테 이래?
- 아이들에게 화낼 때 엄마 내면에 드는 생각, 감정코칭 수업 -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나도 어제 아침에 넷째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내내 했기 때문에 불쾌한 감정들을 느꼈던 거다. '너 때문에 수업에 늦는단 말이야. 그러면 주차 공간도 잡기 힘들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먹여주고 입혀줬잖아. 제발 엉킨 목걸이 푸는 타령은 그만 하라고!' 이런 '너 때문에'라는 왜곡된 의식이 아이와의 관계를 해치고 말았다. 



육아를 서비스라고 정의한다면 서비스의 의미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데 정작 봉사하는 당사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여기는 웃픈 상황이다. 육아가 서비스, 봉사, 베푸는 거라면 일단 피해자 의식부터 버리면 화내는 상황이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 오늘은 여러 가지 할 게 아니고 딱 한 가지만 하려 한다. 화가 날 때 아이들이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을 끊어내보자. 화의 이면에 숨겨진 감정들을 쪼개보며 분노라는 감정에 제어장치를 걸어보자. 변화는 더디지만 조금씩 천천히 이렇게. 



2012년 혹독한 산후우울증을 앓았을 때 그 험난한 과정을 통과하게 해준 책을 다시 펼쳐본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p.133-


오늘 나는 내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글로 묘사했기에 조금은 더 나은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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