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은 줄리어드 Oct 27. 2019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올가 토카르축의 <잃어버린 영혼>을 읽다-

네이버의 육아 포스트 중 한 곳에서 칼럼 연재 제안을 받았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도 바쁜데 뚜렷한 독자층을 의식하고 글을 쓰기엔 내 시간과 에너지가 모자라지 않을까? 아주 적지만 원고료를 받고 쓰는 '칼럼'이라 아무래도 글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자기 검열하게 되지 않을까?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데? 명색이 '선배맘'이라면 내가 후배맘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어떤 글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된다. 편집자 분이 많은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글을 써주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아이를 네 명을 키운다는 사실로 내가 아이를 더 잘 키운다고 생각했다면 아주 큰 오산일 텐데 조심스럽다. 애를 많이 낳아 많은 애들을 키워서 숙련된 부모이고 더 나은 부모라면 옛날 1900년대 일곱 여덟을 낳던 시절, 할머니들이 제일 좋은 엄마들이였게? 그랬다면 우리네 부모들도 그들 부모의 쓴 뿌리를 우리 세대에게까지 되물림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애들이 많아 삶이 힘들어 더 많은 상처들을 우리의 엄마, 아빠들에게 주었지.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저런 모습으로 아파하고 있는 거고. 


어젯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너무나 똑똑하고 지혜롭게 '풀타임맘'으로서 엄마 역할을 잘 감당해내고 있는 듯 보였던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사람책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아픔과 고민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너무나 행복하게 두 아이들을 키워내는 듯해 대견해보였던 이 동생도 잘 사는 듯해 보였지만 우리네 보통 엄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꿈 많던 많은 여인들은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유복하게 구김살 없이 살아왔던 그녀도 7년 이상의 세월을 아이들 양육에 올인하며 지내면서 사회에서 그녀의 자리가 사라졌을 때 자존감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말았단다. 젊은 시절 전문직종에서 자신의 이름을 날리던 그녀도 매일 헷갈리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다시 일을 해볼까? 아니야, 내가 풀타임으로 일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해?' 수도 없는 밤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고민하지만 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던 일을 하고 싶지만 7-8년 넘게 경력 단절이 된 전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너무나 두려움이 앞서고, 그렇다고 해서 일을 하러 나간다 해도 아이들이 걱정이 된다는 거다.


평소엔 겉으로 '좋은 엄마, 똑부러진 엄마'로 보였던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정말 많은 여인들이 숱하게 아파했을 밤들 생각에 마음 한 곳이 아리다. 육신은 건강해보여도 영혼을 잃어버려 아파하는 그녀들이 생각보다 너무나 많구나라는 생각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게 글이라면 도움을 주고 싶다. 전국의 그런 여인들 각자를 만나 다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건네줄 수는 없지만 글로 표현해 많은 그녀들을 위해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아프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미친 듯이 이겨내며 살아가려 애쓴 나의 눈물의 흔적들을 나눠주고 싶다. 아이를 낳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삶의 끈을 놓지 않고 버틴 나날들, 수십 차례 상담을 받으며 내면의 어린아이와 마주한 이야기들, 나를 찾고 싶어 1년 동안 미친 듯이 몸을 만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매일 책으로 글로 성경으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위로하고 사는 이야기, 몹쓸 자아비판적 사고 때문에 괴로운 나날들,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끝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 10년을 지내왔던 이야기. 이 이야기들를 나누어 그녀들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쓰고 싶다. 


자기 이름이 안제이였는지 마리안이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잃어버린 영혼' 속 '얀'처럼 자기 이름을 잊고 사는 세상의 그녀들에게 내가 내 이름, '글쓰는 노라'를 찾기까지 걸어왔고 걷고 있고 걸어갈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이름을 잊고 싶어서 잊어버린 게 아니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어쩌다 세월은 이렇게나 많이 흘러버렸는데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잊어버린 그녀의 영혼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 


며칠을 망설였지만 칼럼 쓰기, 그냥 '고 (go)'해볼까 한다. 편집은 맞춤법 위주로 최소한으로 할 거고 자유롭게 쓰라고 해서. 무엇보다 세상에 영혼을 잃어버린 그녀들을 위해. 우리도 얀처럼 영혼에 귀기울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나도 모르고 그녀들도 모르지만 이렇게 걷다 보면 모두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독려해주고 싶다. 그만 아플 수는 없지만 조금 덜 아플 수는 있다고 손 잡아주고 싶다.

2019 노벨문학상 작가, 올가 토카르축의 잃어버린 영혼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린 얀의 모습 -잃어버린 영혼 중-

"이제 얀은 그의 영혼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어요. 또 다른 일도 했습니다.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시계와 트렁크 따위를 전부 파묻어 버린 거예요. 시계에서는 종 모양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자라났습니다. 꽃은 모두 다른 색깔이었지요. 트렁크에서는 커다란 호박들이 열려, 몇 해 겨울을 조용히 지내기에 충분한 식량이 되었답니다." -올가 토카르축, 잃어버린 영혼 중-


이전 06화 우리가 피해자라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