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한낮의 시선>을 읽다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를 때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엄마? 엄마라고?'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도 저녁 설거지를 하다 넷 중 누군가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에 그 말이 한참 동안 낯설게 들렸다. 나랑 엄마, 왠지 안 어울리는 듯한 조합. 내가 엄마라니. 나처럼 모자란 사람이 엄마라니.
애를 넷이나 낳은 여자가 자신이 '엄마'라고 불릴 때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은 왠지 부적절하게까지 느껴진다. 애를 하나, 둘, 더 낳아야 익숙해지려나? 넷이나 낳았는데도 '엄마'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면 분명 아이 숫자의 문제는 아닐 터.
내일 둘째 아이 로봇 방과후 교실에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로봇을 미리 만들어간다고 오늘 세 시간째 붙들고 있다 밤 10시 반경 결국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본인의 취침 시간을 훌쩍 넘겨 졸려서 자고 싶은데 자기가 원하는 분량을 다 완성하지 못해 속상해한다. 내일 엄마가 동생들 없이 자기만 보러 로봇 교실에 오는데 꼭 이걸 완성해 멋진 로봇이 움직이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거다.
평소에 동생들이라면 학을 떼는 첫째 아이가 보다 못해 나선다. 엄마한테 내일 꼭 보여주고 싶은데 얼마나 속상하겠냐며 동생은 자란다. 자기가 다 해놓겠다고. 결국 아빠와 형아 지원군이 투입해 셋이서 로봇을 완성하고 첫째 아이, 둘째 아이 둘 다 좀 전에 잠들었다.
둘째 아이에게 엄마는 '자기 자신만을 봐줬으면 하는 존재, 내가 잘 하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랑하는 존재'이다. 첫째 아이에게 엄마는 동생에 대한 미운 감정들도 통째로 삭여주는 존재이다.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고싶을 만큼.
'엄마'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는 미천한 자에게 아이들이 기적처럼 찾아와 '엄마'라는 의미를 빚어간다. 그리고 날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 그 사랑이 오늘도 '엄마'가 무엇인지 나에게 알려준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이름에 영혼을 불어넣는 조물주다.
이름은 단순한 음절의 모음이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혀와 바람의 단순한 작용일 수 없다. 이름은 존재의 영혼과 같은 것.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존재를 긍정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영혼은 그 존재의 영혼과 맞닿는 경험을 한다. -이승우, 한낮의 시선, 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