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캉탕>을 읽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로, 유치원으로, 어린이집으로 등교, 등원했다. 여느 때처럼 홀가분하다고 느끼고 싶지만 오늘만은 홀가분하다는 감정을 접어두려 한다. 어제 대화를 나눈 그녀에게 내가 평소 당연시 누려왔던 감정이 미안해진다. 홀가분하다는 감정을 그녀에게 들키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다.
한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뒤돌아서 집에 왔는데 다른 한 아이가 10년째 아파 집에 누워 있다면? 어제 놀이터에서 만난 그녀는 이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감히 그녀의 일상과 그녀가 느껴왔을 감정들을 헤아릴 수조차 없어 마음이 그저 먹먹하기만 하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둘째랑 아홉 살 차이가 난다길래 그럼 첫째는 몇 학년이냐고 물었다. 중1인지, 중2인지 헷갈린다며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러면서 큰 아들이 많이 아파서 몸을 가누지 못해 학교에 못 나간다고 했다. 좀 오래됐다고. 집에 누워 있다고. "어떻게 그 세월을 보내셨어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 이렇게 말을 건넸지만 오늘 다시 어제의 대화를 되돌아보니 나의 대화는 왠지 적절치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손을 잡아드릴 걸 그랬나.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한 학기 동안 수강했던 그림책 강좌가 어제로 끝났다. 12주 동안 그림책을 보며 해석하며 달려왔다. 수천 권의 그림책을 그동안 봐온 강사님이 그림책의 가장 큰 화두를 한 마디로 하자면 '공감'이라고 했다. 매일 부단히 책을 읽고 그림책을 넘기며 글을 쓰면서 타인에게, 가족에게, 나에게 공감하려 하지만 과연 나는 어제 그녀에게 공감했을까? 공감이라는 뜻을 찾아본다.
공감 : 어떤 것을 보고 서로 똑같이 느끼는 것
-보리 국어사전-
공감은 어떤 것을 보고 서로 똑같이 느끼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어제 오후에 만난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녀의 일상을 단 한 시간도 살아보지 않았는 걸.
그렇다면 내가 느낀 것은 공감을 가장한 동정심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연민'과 '동정심'도 그 원뜻을 찾아본다.
동정: 어렵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알아주고 같이 마음 아파하면서 도와주는 것
연민: 남을 가엾고 딱하게 여기는 것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어제 나는 공감도 동정도 하지 못했다. 동정이 도와주는 것이라면 나는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저 연민이었다. 그녀의 일상이 그려지지 않아서, 10년이라는 세월을 차마 내 좁은 머릿속에 상상할 수 없어서 그녀를 연민하고 말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상황이었다면'을 그리며 동일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때론 공감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쓰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어떻게 한 인간이 타인의 고통스러운 처지에 단 한 번도 놓이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아픔을 똑같이 느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를 생각하며 그저 쓰면서 나를 토해내는 일, 변변찮은 이것이 다이다.
내 과거는 나의 일부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나를 해칠 수 있습니까? 어디부터 나입니까? 어디까지 나입니까?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의문 덩어립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데, 그래서 글을 쓰지 못합니다. (p.104-105) -이승우, 캉탕,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