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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줄리어드 Dec 23. 2019

단단함의 이면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을 읽다 2-

"나 버티는 건 잘해요!!!" 친한 동생에게 카톡으로 이 말을 듣는데 단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의 인생 히스토리를 알기에 버티는 걸 잘한다는 그 말이 왠지 그대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격이란 타고난 기질에 후천적인 요소가 가미된 한 인간의 고유한 성질이나 품성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격은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신과 전문의의 이야기를 읽은 후 버티는 건 잘한다에 느낌표가 세 개나 들어간 동생의 메세지에 마음이 쓰라린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아버리면 부서질 것 같은 상황을 버텨내는 걸로, 단단함으로 그동안 포장하며 살아온 건 아니니? 얼마나 애썼니, 그 인생 살아오느라... 너의 아픔을 티 없이 맑은 웃음과 밝음으로 덮어버리려 한 건 아니니?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거나 구멍이 생기면 와그르르 무너져버릴까 봐 너도 모르게 단단함과 버티기의 기술을 살면서 연마해온 건 아니니... 어떻게든 그 인생 살아보려고 그랬구나. 살아내려고 그랬구나...


이 말이 하고 싶었는데 "버티는 게 삶이니 대견하고 예뻐서 눈물이 난다"고만 말하고 말았다.


나는 극 외향적인 성격으로 나의 내향성을 사십 년 동안 포장하고 살았다.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여린 내 마음을 다 내보이면 무너질까 봐 지나친 외향성으로 나의 본디 성향을 잠재웠다. 


'평생을 성취 지향적으로, 언제나 인정에 목말라하고 분위기를 이끌며 살아오느라 얼마나 애쓰고 피곤했니? 너도 다 살아내려고 그랬구나'라고 나 자신을 토닥여주고 싶다. 읽고 쓰는 삶을 살면서 알게 되었지만 내가 이 정도로 내향적인 삶이 잘 맞는 사람인 줄 몰랐다. 살아내려고 지나치게 밝게 지냈던 세월 속 나의 모습들이 스쳐간다. 장기자랑 일 순위 대표, 학생회장, 소개팅 주선을 자처했던 나서기의 달인, 사람들과 하루도 끊이지 않는 만남의 연속, 분위기 리드. 나의 내향적인 본모습을 알고 있는 지금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딸이 악 소리를 저렇게 자주 내는 것도 원래 성격이 사납고 드센 게 아니고, 위로 두 오빠, 아래로 남동생 사이에서 다 살려고 하는 거다.

 

막둥이가 저렇게 장난을 치는 것도 본시 장난꾸러기가 아니라, 이 정글 같은 사 남매 환경에서 나 좀 봐달라고 표현하는 거다.  


둘째 아들이 천성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착한 게 아니라, 큰 형에게 치이고 아래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차마 가운데서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저러는 거다.

 

큰 아들은 본래 이기적인 게 아니라, 맏이 다움을 강요받는 자리라 어쩔 수 없이 자기 위치를 스스로 닦았던 거다.

 

울 엄마, 아빠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싸웠던 것도 원래 못된 사람들이 아니고, 다 우리 삼 남매 부족함 없이 키워내느라 그런 거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삶, 자수성가해서 삶을 일구어내려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그런 거다.


아직 나는 한없이 모자란 아내이자 네 아이의 엄마, 두 부모님의 딸, 며느리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와 타인이 처한, 아니,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바라보는 이해의 폭이 예전보다 조금은 더 넓어졌다.


앞서 얘기를 나눈 동생에게 나의 솔직한 한 마디를 건네고 싶다. "버티지 않아도 돼. 어떤 날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그냥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라고.


성격이라는 게 대부분 생존에 이점이 있어서 발달된 것입니다. (중략) 사람의 성격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구성되었습니다. -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의 말,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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