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다-
아침에 둘째 아이 소풍 김밥을 싸다 엉엉 울어버렸다. 감정 이입,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뜬금없이 찾아 올 줄 몰랐다.
아이가 말한다. 피아노 선생님이 그랬는데 요즘은 소풍을 간다해도 김밥 한 줄 얻어먹을 수가 없다 하셨다 한다. 나는 신혼초부터 김밥을 잘 싸고 많이 쌌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고 살았다. 그런데 식구가 여섯 명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이웃에게 나눠줘 본 적이 없다. 우리 식구 먹을 양 싸기도 바쁘다는 이유였다. 연배가 다소 있으신 피아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내가 남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미덕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 부끄러웠다. 김밥을 두 줄 더 말아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선생님께 '모닝 김밥' 배달을 했다. 아이에게 시켜 현관 문에 걸고 오게 했다.
식탁에서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줬다. "맞아, 예전에 엄마 어렸을 때 소풍 가는 날이면 외할머니가 김밥을 많이 싸서 옆집, 앞집 나눠줬었어. 아니면 점심 때 아줌마들이 애들 소풍 보내고 한 집에 모여 각자 만든 김밥을 나눠먹고 그랬어." 그랬더니 대뜸 첫째 큰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외할머니는 왠지 혼자 드셨을 것 같아. "
되물었다. "왜? 외할머니는 친구 없을 것 같지?" 애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단다. 그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말을 가까스로 이어갔다.
"응, 외할머니 일만 하시지? 그게, 그게 있잖아, 애들아. 외할머니가 친구도 안 만나고 싶어서 안 만나는 게 아니고, 일에만 매달리고 싶어서 일만 하시는 게 아니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서 그래. 아무리 14년이 흘렀어도 죽은 자식을 잊을 수가 없어서란다."
14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나는 참척의 고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감정 이입을 해본 적이 없다. 살아있을 때나 잘해주지 그랬냐고 이젠 그만 잊으라는 모진 말로 당신의 가슴에 더 큰 생채기를 냈다. 살아있는 나나 보고 사시라고 했다. 막둥이 돌 무렵 친정에 내려갔을 때 막둥이 이름이 뭐냐고 하시길래 하도 기가 차서 아무리 넷째라도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에 듣는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간 사람은 간 사람이지만 살아있는 자식에게도 최소한은 해야 하지 않나 원망스러웠다.
몇달 전 엄마가 운영하시는 식당이 화재로 다 불타버리고도 엄마는 기어코 식당을 복구하고 리모델링을 하셨다. 이젠 칠십도 넘었으니 그만 쉬시라 해도 당신은 일을 해야 산단다. 오랜 세월 뒤에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은 오늘, 이젠 제발 식당도 접고 편히 살라고 했던 내가 뱉은 말이 밉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찌 마음 편할 날이 하루라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몇 십 년이 흘러도 어찌 가슴에 묻은 자식이 그립지 않겠는가. 14년 전 언니는 그렇게 갔다. 엄마는 그 이후 계속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나는 14년이라는 시절이 다 흐르고 나서야 난생 처음 엄마 마음이 생각나 울어본다. 엄마의 마음을 보고 나니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의 불행과 쓸쓸함이 보인다.
타자의 슬픔을 보기 싫어 회피했기에 읽어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먼지 묻은 책을 살포시 다시 꺼내 하루 종일 끼고 다녔다. 피하고 피했던 책도 나에게 필요한 책이면 어떻게든 다시 온다. 그 중 한 부분을 기록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28-
아침부터 눈물을 쏟아내고 김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애들 네 명을 다 등교, 등원시키자 마자 '감정코칭' 수업 2차시를 들으러 댓바람으로 달려나갔다. 인간은 느끼는 게 본능인데 본능까지 강의 들으며 배우러 다녀야 하는 내가 안쓰러웠다. 슬픔, 분노, 모멸감, 기쁨, 이런 걸 배워야 안단 말인가. 그럼, 모르면 배워서라도 알아가야지.
슬픔이라는 것도 이렇게 전문가에게 배우고 책으로 읽고 글로 쓰다 보면 더 많은 타인들의 슬픔에 가닿아 있겠지. 엄마의 마음 구석구석도 보이겠지. 내 자식들도 더 품어줄 수 있겠지. 감정을 공부하며 읽고 써나가는 일상에서 나도 상처 입은 공감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본다.
영혼이 아픈 사람들을 위한 쓰기의 숙명은 시작됐다. 이젠 내가 멈추려 해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다.
-슬픔을 공부한 어떤 날, 2019년 10월 17일에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