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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은 줄리어드 Mar 15. 2020

섬, 단순한 삶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다-

지금 우리 모두는 '000동 000호'라는 외딴섬에 갇혀 삶을 살아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 섬이 감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나와서 뉴스에서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못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자유로이 못 만나는 상황이라 '마음의 방역'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불면증, 건강염려증, 혹은 스트레스성 두통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불안, 공포, 우울에 잠식당할 수 있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 


네 아이들이 한 달, 두 달, 방학만 한다면 늘 울상이 지어졌다. 단 두세 시간만이라도 자유 시간이 필요한데 방학 때는 그런 시간이 쉬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도 요물스러울 줄이야. 방학보다 더 한 자체 감금, 섬 생활이 시작됐고, 앞으로도 개학하기까지 3주나 더 섬 생활이 지속될 거라지만, 이 시간에 갑갑증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제일 안전한 곳이 집이니라고 뇌가 인식하니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상하리만큼 이 외딴섬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또 왜일까.


첫 번째 이유는 단순한 삶을 살아서이다. 아마 이 사실이 마음도 몸도 편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일곱 시부터 일어나서 네 아이들 아침 먹여 식판 싸고 가방 챙겨서 버스 태우고, 유치원에, 어린이집에, 학교에 따로따로 등교, 등원시키는 부산스러웠던 아침으로부터 한없이 자유롭다. 두 시 반만 되면 하원하는 딸 버스 하차하는 곳에 헐레벌떡 데리러 가는 오후로부터도 자유롭다. 네 아이들의 매일 각자 다른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주는 느긋함을 즐기고 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세 끼만 걷어먹이고 잘 놀아주고 자고 싶을 때 자는, 절대로 시간에 쫓기지 않는 단순한 섬 생활이 나쁘지 않다. 


둘째, 시일이 걸리긴 하겠지만 코로나가 언젠가는 극복될 거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이다. 과거에 지금보다 훨씬 과학이나 의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페스트나 콜레라를 이겨냈던 인류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코로나19는 지나갈 거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애쓰고 있는 국가와 사람들이 있다. 바이러스와 대적하여 사투하는 최전선의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들에 비하면 나의 일상은 배부른 자의 사치스러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 클릭질만 하면 택배가 하룻밤 사이에도 어김없이 집 앞까지 온다. 외딴섬에서 오늘이 몇 일인지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 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먹고 놀고 자고 읽고 쓰고 있다. 최전선의 그들에 비하면 나의 이 쓸데없는 한량함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섬에서 즐기는 단순한 삶, 감사한 하나하나의 요소들을 차분히 열거해보기로 한다. 


1. 급감한 빨래 


하루에 두 번씩 세탁기가 돌아가도 감당할 수 없었던 여섯 식구의 빨래가 반으로 줄었다. 외출을 못 하니 빨래가 줄은 건 당연지사.


2. 뭐든 할수록 는다

느는 건 요리 실력. 우리 가족 외식 좋아한다. 물론 대가족이라 식당 가서는 아니고 음식을 시켜 먹거나 포장해서 사다 먹는 걸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삼시 세끼 짓다 보니 요리 아이디어도 는다. 신랑이 국을 즐겨 하지 않아 국을 잘 끓이지 않는데 아침에는 오랜만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였다. 구수한 집 된장 냄새에 기분까지 상쾌했다. 점심에는 크림 파스타에 샐러드를 서빙했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십 년도 넘은 레시피북을 꺼내 마파두부를 했다. 파 송송 썰고 파기름 내서, 마늘 듬뿍 볶다가 돼지고기 넣고 간장 투척, 양파 넣고 자글자글. 두부 넣어 두반장 양념으로 마무리하는 매콤한 마파두부, 신랑이 엄지척했다. 


3. 많아서 좋다 

아이들이 많으니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많다. 더구나 필로티 2층에 사니 아랫집이 없어서 마음껏 뛴다. 우리가 하는 다양한 놀이들. 여럿이라 풍성하다. 


-색칠공부

-원카드 

-보드게임 

-숨바꼭질 : 나는 노예 술래다. 아이들이 나한테만 술래를 시킨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평수는 작아도 복도가 긴 집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기에도 충분한 복도다.

-풍선 불고 던지고 놀기 

-피아노 치며 겨울 왕국 노래 부르기

-보드게임 

-젠가 

-블록 놀이 

-공 놀이 


4. 생각의 전환 

최근 몇 년 동안의 3월을 떠올린다. 봄의 불청객, 황사와 매캐한 초미세먼지, 미세먼지 때문에 어차피 3,4월에 바깥에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도 않았다. 한 달에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찬란한 봄을 만끽하러 바깥에 자유로이 다닐 수 없었다. 


5. 자유

학교, 피아노, 수영, 방과후를 비롯해 한 달 동안 아무 스케줄도 없는 아이들이 퍽이나 자유를 즐기고 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일 없이 자유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지금껏 있었을까? 시간과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는 한없는 자유를 아이들이 맘껏 즐기기를 바란다. 


6. 1일 1영화 

섬이 키즈 카페도 됐다 9시, 1시, 6시엔 삼시 세끼 집밥 식당도 됐다 밤엔 극장이 되기도 한다. 


7. 돕다

엄마는 삼시 세끼를 만들고 치워야 하니 엄마를 잘 도와달라고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둘째가 넷째를 재워주기도 하고 첫째가 넷째 치카치카도 해준다. 


8. 아직은 무탈하다 

코로나가 돌기 전 네 아이들 정기 안과, 치과 검진 다들 다녀와서 병원 갈 일이 없다. 심지어 나는 스케일링까지

받았다.  


9. 신랑을 가까이

출장이 잦은 신랑이 화상회의로 모든 회의를 대체하고 있다. 출장이 없어져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일찍 오는 편이다.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잠든 날이 숱하게 많았는데 아이들이 아빠를 날마다 보고 함께 놀고 나서 잠이 드니 좋다. 


10번은... 이 외에도 수많은 감사함으로 채우기로 한다.  


답답하고 힘들고 지치는,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무인도에서 무려 28년을 혼자 표류해야 했던 로빈슨 크루소보다는 우리가 더 낫지 않은가. 버려진 봄에도 필시 꽃이 필 터이니 감사함으로 기다릴 뿐이다. 


비록 내가 지금 형편을 매우 비참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편리함을 허락해 주셔서 불평할 것보다는 감사할 일이 더 많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알게 됨을 위안으로 삼고 하나님의 축복을 희망하게 된 것에 감사했으니, 이것은 내가 그간 겪었고 또 겪을 수 있는 그 모든 고초와 충분히 대등한 정도가 되고도 남을 복락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을유출판사,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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