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릴 수 없는 은총

-이봄의 <영화, 여자를 말하다> 중 <스틸 앨리스>를 보고-

by 마음은 줄리어드

대화가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편안함을 느낄 리가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때도 많다. 대화 단절 환경이 익숙한 내가 아이들의 마음과 일상을 꽤 많이 들여다볼 수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건 가히 주님의 은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또 다른 친구나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속상한 일이 있었더라도 하루의 마무리만큼은 감사함을 떠올리며 보내려 하고 있다. 감사함을 나누는 것이 대화에 서투른 내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매일 밤 네 아이들을 재워주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먼저 오늘 하루 중 힘들거나 짜증 나거나 속상하거나 슬픈 일, 부정적인 감정을 나눈다. 한 가지라도 좋고, 여러 가지라도 좋다. 그다음엔 감사한 것 다섯 가지를 나눈다. 아이들이 하나씩 열거하다 보면 나는 자연스레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어땠어?", "그 친구는 뭐라고 그랬는데?", 또는 " 그중 뭐가 가장 좋았어?"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대화는 신기하게도 계속 이어진다.


큰 아들은 오늘 친구가 아끼는 잠바를 잃어버려서 같이 찾을 때 걱정이 됐단다. 오늘 학교 후 축구와 피구를 해서 행복했고. 엄마가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들어줘서 좋았고, 오늘 같은 반 친구들과 과학관에 다녀와서 재미있고 감사해 했다. 둘째 아들은 친구가 재미있다고 추천한 책, <우리 반 욕 킬러>라는 책을 빌려서 읽었는데 재미있어서 좋았단다. 오늘 수영을 해서 감사했고. 셋째 딸은 오늘 깁스를 푸는 날인데 못 풀어서 속상했단다. 하지만 오늘 장난감 정리를 잘 해서 엄마의 칭찬을 들어서 좋았다고 감사함을 표현했다. 막둥이는 발톱 중 하나가 문에 껴서 검은색이 돼서 속상하단다. 감사함은 아직 어려 의미를 잘 모르는 듯하다. 그래도 교회에서 들은 찬양을 흥얼거릴 정도면 막둥이도 감사함을 함께 나눌 날이 머지않다.


이렇게 속상함과 감사함의 대화를 나눈 뒤, 한 명 한 명을 축복하고 소리 내어 기도를 해 준다. 나의 기도를 들으면 아이들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주인공,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를 겪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했던 연설 중 인상 깊은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I am not suffering. I am struggling.


삶은 인간에게 때론 고통스럽게, 때론 힘겹게 다가온다. 나도 내 아이들도 날마다 속상한 일, 좌절스러운 일, 슬픈 일들 속에 있다. 그렇지만 삶이 은총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인생의 모든 것이 나의 힘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이, 주님의 이끄심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삶이 ‘은총’임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은 그저 선물이 된다. 은총은 나에게 겸손함을 가르쳐 주고 감사함을 배우게 한다. 내 자녀들도 삶이 은총임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매일 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나눈다. 그것이 대화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내가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가장 값진 대화이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곧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은총에 의해 인간은 무한한 몰아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p.358) -토머스 머튼, 칠층산-

은총은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은총을 맞이해 받아들이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비움을 만드는 것도 은총이다. (p.20)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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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자를 말하다 스틸 앨리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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