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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Aug 19. 2020

세계여행 말고 이곳에서

졸업을 앞두고 구직을 시작했다.

이력서는 내게 언어의 즐거움이 아닌 토익점수로 환산된 수치를 물었다. 강남으로 어학원을 꾸역꾸역 다니고서야 토익 880점을 겨우 만들어냈다. 이력서를 보내고 기다리는 시간들. 기약은 없었다. '오늘 뭐하지?', 도서관과 집을 오가는 거 외에 하루를 설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일주일 즈음 지나면 탈락 문자를 받았다. 몇 군데 이력서를 넣고 기다리기만 해도 한달은 성큼 지나가버렸다. 내일에 대한 불안함, 스스로에 대한 초라함들이 내면에 스멀스멀 들어섰다.


면접 자리에서는 그런 어두움을 다스리며 밝고 긍정적으로 보여야 한다. 나는 그게 어려웠다. 양복을 새로 사거나,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착용해 보았다. 누구도 실패의 원인을 이야기 해주지 않았기에, 그때마다 외적인 변화를 모색하였다. 보이지 않는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스스로를 깎아내었다. 이때는 ‘나의 자리, 나의 테두리’만 생긴다면, 삶은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구직을 하면,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일년 동안 실패한 이력서 폴더만 늘어갔다. 연말이 되어서야 이 무력함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몇몇 책이 그 생각에 힘을 싣어주었는데, 특히 일랭드 보통의 '불안'과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나의 실패가 사회적인 문제위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생각은 다른 가능성을 찾아나서며 NGO 단체 구인정보에 접속하였다.


단체에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는 날, 처음으로 내 생각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 느낌이 좋았고, 그 사람은 나의 첫 팀장이 되었다. 그렇게 사회의 첫발을 비영리조직에서 시작했다. 나의 일은 유럽과 아시아의 청년들을 초대해 한국에서 자원활동, 캠프, 포럼을 하도록 기획하는 일이었다. 일의 호흡이 일 년 단위로 움직였고, 반복되는 흐름 안에서 성장하는 안정감이 들었다. 작지만 하나의 팀 안에 소속되어 바쁘게 움직였고, 한 달이 지나면 월급이 들어왔다. 형이 자취하던 서울집을 이어받아 나만의 살림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년, 이년, 비슷한 하루와 계절이 포개졌다. 익숙한 계절이 반복되며 삶도 행복으로 나아가는 듯 했다.


NGO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주로 연대, 대안, 환경, 평화 등 진보적인 언어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소위 '활동가(activist)'라는 낯선 사람들이 한국과 아시아, 유럽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세상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갈 수록, 내가 대학 때 열심히 배웠던 마케팅의 의미는 다르게 곱씹어졌다. 그 화려한 언어들이 어떻게 사람의 불안과 사회문제를 기민하게 유발하는지 새롭게 해석되었다. 처음엔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사회학과 인문학의 언어, 대안을 말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실무자로 일했던 5년의 시간은 내가 한 명의 시민으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분야에도 많은 모순과 문제들이 있었다. NGO나 사회적 단체들도 정부나 기업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많아지면서, 진정성이나 가치를 지키려는 말들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비즈니스를 잘 아는 사람, 마케팅을 잘 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들어섰다.


“정말 그런 말을

믿었단 말이야? 순진하긴.”


등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가장 힘든 건 계약직 문제였다. 계약이 끝나면 함께했던 사람들과 일에 쏟은 가치, 애정, 관계처럼 무형의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곳도 별로 다른 게 없잖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분했는지 내안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이곳에서도 나는 속았구나. 배신감이 컸다. 첫 번째 일터에서 문제제기를 하다 떠밀려 나왔고, 이후 계약직과 프로젝트 등 단발적인 조건으로 일을 하였다. 계약이 끝나면 홀가분했지만, 취직이 안 되던 시기에 내재된 불안은 금세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해야 할 일정과 메모로 가득했지만 쏟았던 에너지들은 삶의 구체적인 서사와 다음을 약속해주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버릴까?"

서점에 가면 서른에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로 떠난 사람들의 여행담이 많다. 생각해보니 호주에서도 그런 한국 사람을 제법 보았다. 그들도 직장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였으리라,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한국이 아니라도, 이곳, 이런 방식이 아니라도 어딘가에는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호기심으로 세계여행, 해외자원봉사, 워킹홀리데이 등을 떠나고 돌아온 여행담은 10년 넘도록 차고 넘치는데 여전히 팔리는 이야기다. 나도 다시 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국제교류 일을 하며 알게 된 외국 친구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관심 있는 마을과 공동체에 머물면 대략 1~2년은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은 돈으로 떠나는 순간만 자유롭고, 쉬이 불안해 질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해외에 대한 판타지가 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을 때

무엇이 달라질까?”


무엇보다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한국에 초대했던 외국 활동가들의 눈은 유독 빛나 보였다. 대부분 자신의 나라, 지역의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그곳 문제를 마주하며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발 딛고 있는 한국에서, 이 토양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면, 세계를 몇 바퀴 돌고 와도 방황은 반복될 것 같았다.


지금, 여기, 구체적인 무엇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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