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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Oct 30. 2020

예술가의 4대 보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한 동안 집에 알리지 않고 지냈다. 한달 즈음 지날무렵 집에서 걱정 가득한 전화가 왔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공단에서 집으로 지역가입 통보서를 보낸 것이다. 그때는 4대 보험은 직장에 다니면 당연히 주어지고, 안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세금처럼 나의 월급을 차감하는 정도로 존재했다. 납부가 중지되자 마자 날아간 통지서 덕분에,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의 퇴사가 알려진 것이다. 4대 보험은 한동안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일을 시작하고 그만두는 과정에 계속 '납부 할꺼니?'의사를 물으며 따라다녔다.      


점점 4대 보험과 상관 없는 단발적인 일들이 이어지면서, 병원에 갔을 때 곤란하지 않도록 건강보험만 지역가입자로 납부하였다. 건강보험 외의 보험들은 고용주 없이 납부하는 비용이 부담되었고, 당장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큰 불편 없이 살다가 4대 보험의 존재를 크게 체감한 건 아버지의 사고였다. 일터에서 발생한 아버지의 사고 이후, 산재보험이 보장하는 범위를 아주 가까이서 체감하였다.      


사고는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 사람의 신체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상황 안에서, 보호자로 지명되는 가족은 생각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계좌의 비밀번호나 공인인증서 등 개인만 알고 있는 금융정보들은 당사자가 아니면 접속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중환자실의 수술과 위중한 치료들은, 가족의 슬픔과 별개로 매주 병원비를 청구하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을 경제적으로 수습해야 하는 일이 펼쳐진다.    

  

산재보험은 정말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수습에 큰 경제적 완충망이 되어주었다. 건강보험에서 보장되지 않는 범위까지 병원비가 공제되었고, 간병인을 고용하는 비용도 청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받던 근로자의 월급 80프로가량을 후유 수당으로 지급해주었다. 피해를 증명하고 청구하기까지의 행정 처리는 까다롭지만, 사고의 뒷감당을 해야 하는 주변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병실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입원한 환자들이 많았다. 뇌를 다친 젊은 사람을 보며 나에게도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혼자 작업하는 나에게 뚜렷한 안전망은 없었다. 그림을 그리게 된 이후는 낮은 소득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균일한 월급을 바라보며 사는 삶과 다른 일상의 전환이었다. 이전보다 소박한 규모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고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간과하고 산 것은 내가 감당하지 못하게 된 순간에 필요한 안전망이었다. 삶의 기반은 눈에 보이는 영역보다 더 깊고 멀리 존재했다. 내가 생각한 짧은 호흡보다 더 먼 시간을 생각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늘 앞에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이거는 왜 이렇게 밖에 안되나’하며 삐딱하게 보기도 하였다. 타인의 삶, 타인이 꾸려온 커뮤니티 등 한 동안 기존에 존재하는 기반을 그런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내 앞에 나의 의견을 결제하는 사람도, 책임을 지는 사람도 하나씩 사라졌다. 아버지까지 사고로 다친 이후에는 정말로 내가 맨 앞에 서게 되었다.  

    

몇 년 전, <예술인 복지재단>에 예술인으로 등록해두었었다. 나라에서 인증하는 예술인이 되어도 당장 달라지는 건 없지만, 국가에서 지원하는 예술인 사업에 응모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중요한 건 ‘예술인 사회보험 지원’이다. 단기 계약이 주를 이루는 예술인들의 노동 환경은, 나처럼 최소한의 건강보험만 유지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거나, 거래처와 미팅하러 가는 사이에 교통사고가 나도 대책이 없다. 업무 중에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도 오롯이 작가 스스로 밖에 없다.      


재단은 고용주 대신 사회보험을 절반씩 납부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에 늘 홍보하고 있지만 대부분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잘 챙겨보지 않는다. 서류를 챙겨서 산재보험에 가입하였다. 지금은 국민연금도 재단과 함께 납부하고 있다. 이 또한 부모님 앞으로 매달 지급되기 시작한 국민연금을 보고서 마음이 변한 이유이다. 이제는 만나는 작가마다 예술인 보험에 가입하라고 열심히 홍보해주고 있다. 서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작업하고 살아야지 않겠나.       


기반을 만드는 일은 쉬운 게 하나 없다. 자동차를 점검하러 카센터에 가니 수리하고 교체할 부품들이 많았다. 바퀴가 해부되어 허공에 떠있는 차를 기다리며, 모르고 살던 삶의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집에 있는 차를 빌려 타기 전, 아버지는 고장 난 곳이 없는지 카센터에 들러 점검하셨을 것이다. 그간 혼자 잘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앞에서 마련해준 기반 위에서 안온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작업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과연 나와 내 주변을 지켜낼 수 있을지, 서로 발 딛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 여전히 물음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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