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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May 07. 2018

마음에 맺히는 그림

할머니의 임종 사진 뒤로,

다섯 남매와 각 슬하의 아들과 딸들이

검게 늘어섰다.

유골을 끌어 앉은 사내의 큰 등이

둥근 호를 그리며 흐느꼈다.

2018. 3  /  30X42cm  /  수채화


2015년, 가족의 생애를 인터뷰하는 구술사 프로젝트를 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인터뷰하였다. 인터뷰 명분이 마땅치 않아서, 중년 남성의 자료조사라는 이유로 인터뷰를 설득했다. 55년생인 그에게 삶의 기억은 '노동'이었다. 할아버지가 꾸려놓은 농촌에서 출발해, 도시의 섬유공장에 취직하고, 가정을 꾸려나가기까지 변곡점이 있던 년도를 구체적인 숫자로 기억하고 구술했었다. 공장에서 돈을 버는 노동과, 할아버지의 농사까지 병행하던 삶은 청년 때부터 요구되었다.


녹취를 풀고 나서 인터뷰 글 제목을 '쉼표 없는 근로'라 지었다. 노동과 가정은 그가 삶에서 가장 큰 요소였다. 그의 젊음을 더듬어 보려 앨범을 들추어도 '일상적'인 사진은 없었다. 군대, 직장 체육대회, 결혼식, 신혼여행 등 이벤트의 장면만 존재했다. 인터뷰 이후로도 간간히 생각나던 것들을 식탁에서 설명해주었다. 그렇게라도 들어 놓길 잘했었다.      


맏이인 아버지가 지탱해야 했던 가족의 범위는 넓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할머니의 부양과 시골의 살림, 논과 밭의 운영, 제사와 명절까지, 곳곳에 그의 수고가 필요했다. 수고는 재산을 더 물려받았으니 당연한 책무처럼 그의 어깨에 늘 짊어져 있었다. 엄마는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게 맏이라고 했다. 사고가 나기 5개월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봄부터 진행된 할머니의 노화로, 병실에서의 간병과 돌봄은 맏이인 나의 부모님 몫이었다. 시어머니 입원과 퇴원에 엄마의 노동이 이어졌다. 할머니의 자녀들은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소변을 보는 것, 옷을 갈아입고 밥을 떠 넣는 구체적인 돌봄에는 무력했다. 드나듬 만으로는 임종을 함께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앉아계신 채로 돌아가셨다고 엄마는 말했다.     


할머니의 임종 사진 뒤로 다섯 남매와 각 슬하의 아들과 딸들이 검게 늘어섰다. 한 여성의 자궁에서 이어진 검정 뿌리들은 깊고 넓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이 슬픔에 취할 수 있을 때도, 아버지는 장례식장의 들고나가는 사람, 삼일장의 다음 절차와 상조회사와의 회계를 챙겨야 했다. 발인하는 날, 유골을 끌어 앉은 아버지는 그제야 흐느꼈다. 사내의 등은 둥근 호를 그리며 슬펐다.


이후 사십구제까지 잘 해내고자 했던 아버지의 수고는 뜨거운 여름까지 이어졌다. 아버지의 둥근 등과, 장례식장의 검게 이어진 친척들의 잔상이 내 마음에 남았다. 장례식 이후 그 이미지를 그려보려 했다. 표현이 서툴러서 잘 그려내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안 되어, 아버지의 긴 수고는 아래 동생의 시비로 흩어졌다. 다른 형제들은 이 상황을 개인 간의 갈등 정도로 머뭇거렸고, 아버지가 삶을 지탱했던 수고의 한 축이 지워져 갔다. 지워진 자리에 허무함이 수시로 들어 찾고, 하소연이 늘어갔지만 누구도 해소해 주지 못했다.


아버지가 바닥에 머리를 찧던날, 그의 등을 떠민 건 삶의 허무이지 않았을지. 나는 사고 이전에 훼손된 그의 존엄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꿈속을 더듬어 시골집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장례식에서 슬프게 둥글었던 그의 등과, 검은 뿌리처럼 이어진 가족의 모습도 다시 그려보았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우리 가족의 일상은 병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에게 추가되는 혼란은, 처음 마주하는 장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예민하게 발달한 시각은 이런 장면들에 반응하고 있었다. 병원을 오고가는 길거리의 풍경부터, 병실에 펼쳐지는 장면들까지 너무 많은 시각적 자극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새로 다가온 장면들이 너무나 농밀했고, 한꺼번에 쏟아져왔다.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의 밀도와 함께, 마음에는 사건을 겪어내는 감정들이 쌓였다. 여러 잔상들이 슬픔과 뒤엉켜서 몸 안에 굴러다녔다. 뭔가 그려내지 않고서는 해소되지 않는 잔여물들이 그득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림을 그렸다. 긴 시간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의식 없이 길고 깊게 감긴 아버지의 눈매, 머리뼈를 드러내어 굴곡진 이마가 창 밖의 산 능선처럼 보이던 순간도 있었다. 긴 겨울잠 너머를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기억을 더듬고 있을지, 어떤 풍경을 지나고 있을지, 더디게 이어지는 잠의 시간을 따라가 보았다.


그와 나누었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며 시골집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잠을 자는 사람과, 꿈의 세계. 이중섭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이중섭이 그림에는 가족과의 꿈같은 재회를 소망하는 작가의 바램이 있었다. 그가 남긴 형태를 따라 그리며 아버지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장례식에서 슬프게 둥글었던 그의 등과, 검은 뿌리처럼 이어지던 가족의 모습도 다시 그려보았다.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수술이 권유되었다. 무엇이 다행이고 무엇이 위험인지 이 수술은 다행히 될지 위험이 될지 판단의 여지는 우리에게 없었다. 충분히 들었음의 '들었음'과 나의 싸인을 동의서에 기입하고, '잘 부탁드린다'는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어떤 설명을 들어도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천수경을 펼치고 계신 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을 그렸다. 우린 수술실 앞에서 말없이 두 손만 모으고 있겠지만. 또 다가올 하루를 무사히 건너길 바랬다.     


가슴에는 늘 시린 물이 찰랑인다. 언제부터 하구에 둑이 생겼는지, 찰랑이는 시린 물이 그득하다. 숨을 깊게 들이쉴 때 찰랑이는 물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눈을 바라볼 때도, 손을 잡을 때도, 꽃이 피고 있을 때도, 면회를 마치고 돌아 나올 때도, 내방 책상에서 연필을 들고 바라본 하얀 A4용지에도 시린 순간이 잦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수고에 대해, 존엄에 대해, 삶에 대해, 형태가 없는 인상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어머니가 매일 절에 다니는 마음과 내가 종이 위에 서는 마음이 비슷하지 않을까.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이 모아질 수 있다면 이렇게라도 모아서 아버지의 마음이 풀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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