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하늘에>는 굴뚝에 올라선 파인텍 노동자를 떠올리며 시작 된 작업이었다. 2017년 겨울부터 시작된 굴뚝농성은 뉴스에 잘 회자되지 않다가 2018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야 조명되기 시작했다. 평화를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시기와 그들이 오른 날수가 이제는 세계최장 기록을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등장하지 않던 회사 이름 ‘파인텍’과 사장의 얼굴도 뉴스에 올랐지만, 희망적인 기류는 아니었다. 그해 5월경, 힐스에서 만난 김장성 선생님이 짧은 글을 건네 왔었다.
‘하늘에 나뭇잎 흔들린다.’
‘하늘에 바람이 불고’,
‘하늘에 해가 저문다.’
하늘을 묘사하는 나지막하고 간결한 문장이 시처럼 적혀있었다. 글의 끝에 도달해서야 ‘하늘에 굴뚝이 있다’, ‘하늘에 사람이 있다’로 마무리되며 왜 저곳에 사람이 있는지 질문하였다. 이 글을 뼈대로 그림책을 그려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생각한 그림책 작가는 그림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나 자신만의 판타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그림책은 일찌감치 생각을 접고 있었다. 하지만 뉴스에서만 안타깝게 보던 현실에 기여할 수 있는 그림책이라니. 당연히 해야 했다.
하늘을 묘사하는 문장 하나에 한 장의 그림, 하나의 하늘이 필요했다. 여기서 명시하는 하늘은 도시의 하늘이었다. 해가 저무는 도시의 퇴근길, 별이 떠있는 도시, 도시 외곽에 자리한 철탑, 한 낯의 도시에 덩그러니 솟은 광고탑 그리고 굴뚝. 도시의 풍경과 그곳 어딘가에 솟아오른 구조물을 화면에 등장시켜야 했다. 건물을 그리는데 자신이 없었다. 자연 풍경과 소재라면 익숙하지만, 인공적이고 직선의 건축물을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주제에는 200프로 공감하지만 하늘 아래에 그려넣어야 하는 직선은 너무 낯설었다. 건물을 헐렁하게 그려내면 의도치 않게 도시가 유희적이고 따뜻하게 읽혔다. 도시의 고독한 정서는 직선을 직선답게 그어내고 건물을 건물답게 그려내야 드러났다.
덕분에 하늘을 많이 올려다보고, 도시를 많이 내려다 보았다. 길을 가다 문득 올려다본 보편적인 하늘은 어떤 느낌일지 생각하면서, 하늘에 무엇이 등장하는지 관찰했다. 교회의 철탑, 가로등, 전봇대, 공원의 나무들을 프레임에 넣고 하늘과 어떻게 조우하는지 보았다. 하늘은 늘 그림의 배경이었지, 전경이었던 적은 없었던거 같은데, 하늘을 그린다고 염두 한 관찰은 때때로 낯설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은 상가건물 꼭대기 층이어서 옥상이 가까웠다.
간병하는 날은 틈틈이 옥상에 올라 시간대에 따라 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새겼다. 해가 저물고 아파트 곳곳에 불이 켜지는 풍경과 그 안에 머무는 사람도 가까이 보였다. 신도시의 구조는 어디든 비슷해서, 파인텍 노동자가 올라선 목동 열병합 발전소의 굴뚝이, 병원이 자리한 영통 신도시에도 똑같이 있었다. 영통의 굴뚝을 보면서 목동의 굴뚝을 보는 느낌이었다.
연말에는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은 금방 다가왔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 날수가 지나도 사측과의 좋은 대화 소식은 없었다. 언론에서 조명해주는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되었고, 더 길어져도 안 된다는 위기의식 속에 노조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굴뚝의 농성자들도 단식에 들어갔고, 지상과 식량을 주고받던 밧줄을 아래로 던졌다. 그들의 뉴스가 등장 할 때 마다 나의 마음은 더 초조했다. 더 일찍 완성해서 이 상황에 보탬이 되었어야 했는데 늦었구나. 마음만 급했다.
초조한 마음과 다르게 그림은 일주일에 한 장 완성될 정도로 더디었다. 그 사이 아버지의 수술로 종합병원에 전원 했다가 다시 재활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들도 이어졌다. 하루 종일 아버지의 퇴원수속과 이동, 다시 새로운 병원에 입원을 마무리 짓고 돌아온 저녁. 굴뚝에서 내려 온 두 사내가 저녁 뉴스에 나왔다. 그간의 서러움과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눈물이 보였다. 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저곳에서 함께 축하해 주지 못해 아쉬웠고, 조금 더 빨리 힘을 보태지 못해서 미안했다.
빨리 완결지어야 한다는 초조함에서 비켜서서, 작업 자체에 집중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비수기여서 다른 일정 없이 그림책만 작업하기 좋았다. 다른 생각이 침투하지 않는 시간이 하루하루 반복되면서, 작업에 더 깊숙이 몰입하는 집중력이 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올랐다. 일어나고 잠들기 전까지 작업 하나로 응집되는 규칙성은 이전과는 다른 힘으로 쌓여갔다.
책의 막바지 장면에 이르러서야, 쌍용자동차의 철탑, 비정규직 노동자의 광고탑,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 그리고 파인텍 노조의 굴뚝을 한 장면씩 그렸다. 각 장면마다 기사와 이미지와 보도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치열함, 긴박함, 비장함들을 보면 절로 감정이 울컥울컥 했다. 한소끔 마음을 흘려보내고서야, 철탑의 빼곡하고 묵직한 직선, 육중한 조선소 크레인, 원형 콘크리트의 굴뚝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때 그 현장에 공명하는 것과 구조물만 피사체로 대하며 그려내는 건 별개의 감정이었다.
도시에서 하늘은 늘 존재하지만 잘 올려다보지는 않는 공간이자, 유일하게 비어있는 공터이다. 마천루가 풍경을 찌르듯 솟아있고, 해가 지고 뜨며 불이 밝혀지는 밤으로 변하는 풍경. 빛에 따라 바뀌는 직선의 그림자들은 쓸쓸한 풍경을 지어내었다. 그 하늘을 찢고 올라선 구조물에 사람이 올라섰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사람이 그곳에 머물렀다. 하필이면 추울 때에, 하필이면 더울 때에 사람은 그곳에 머물렀고, 너무 긴 계절이 반복되어 하늘 속 풍경처럼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게 된 시간도 있었다.
처음 이 책의 짧은 글귀를 받아들고, 하늘을 반복해서 명시하는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주제에 동의하기 때문에, 풍경을 잘 나열하면 되지 않겠나 정도의 생각이었다. 계속해서 하늘을 응시하고 그려내기를 반복하면서, 이 그림책의 의미는 완성될 즈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장면이 된 하늘의 풍경, 익숙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풍경, 그곳을 지긋이 응시하도록 인도하는 것. ‘왜 저곳에 올라갔는지’ 질문하지 않게 되어버린 시대에, 그 공터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는 마음으로 그림책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