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옥이네>의 두 번째 호부터는 취재에 동행하였다. 53번 버스를 운행하는 버스기사, 꽃집을 운영하며 노래하는 주인 등, 지역 인물을 인터뷰하는 자리에 따라다녔다. 취재와 인터뷰를 따라다니며 인물의 맥락을 파악하고, 그 사람의 주변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표지로서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잡지의 대표성을 생각하면 아쉬웠다. 네 번째 호부터는 그달의 특집기사를 표지로 그려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다음 주제는 지방에 귀촌한 청년 농부였다. 홍성에 청년들이 농사짓는 공동농장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 내내 뭘 그릴 수 있을지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이미지가 보이지 않아 홀로 초조해졌다. 비닐하우스에서 기사에 담길 사진이 촬영되었다. 이 장면으로 청년 농부가 표현될 수 있을까? 버스기사나 꽃집 주인을 그려야 할 때에도 같은 고민이 들었다. 지역의 버스기사, 지역 꽃집, 농부를 그려야 하는데, 찾아가서 본 지역의 풍경은 이미 도시만큼 현대적이다. 버스도 신식이고, 건물, 비닐하우스 모두 매끈한 모습이었다. 이미 현대적인 장면 속에서 지역적인 정서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홍성 취재에서 돌아온 이후 나의 작업 방식을 고민하였다. 지금처럼 직접 보고 그리거나 사진자료를 재현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한계였다. 모든 의뢰마다 취재를 갈 수도 없는 시간적인 문제와, 현장을 가봤다고 해서 주제에 부합하는 장면이 보장되지 않는 이슈가 겹쳤다. 특히 재현하는 그림은 사람의 비율, 구도가 틀어졌거나, 명암이 자연스럽지 못하는 등, 숙련도가 고스란히 보인다. 잘못하면 미숙해 보이는 그림이 되었다.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가져가는 일러스트 작가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더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면 언젠가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이번 주제인 ‘청년 농부’만 글자로 끄적여 둔 빈 종이만 한참 바라보았다. 일단 청년 농부에 연상되는 이미지를 낱말로 적어보았다. 밀짚모자, 멜빵바지 그리고 괭이 등 생각나는 단어들을 떠올렸다.
적은 단어를 염두하며 한 젊은 남성을 슥슥 그려보았다.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그려졌다. 그동안 사람을 그려왔던 연습량 덕분이었다. 밀짚모자와 멜빵바지를 입고 괭이를 어깨에 기댄 어수룩한 사람이 그려졌다. 청년 농부로 납득할 만한 인물이 보였다. 정교하지 않아서 투박한 형태가 되려 편안한 정서로 느껴졌다.
이 스케치를 발전시킬 채색 방식이 필요했다. 명암을 정교하게 넣거나 소실점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 편편하게 한 색으로 칠해 넣는 방법이 적합했다. 사람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는 이모티콘이나 캐릭터 일러스트들이 대체로 이런 표현법을 쓴다. 외곽선은 두껍게 하며 내부는 한 톤으로 채색하는 방식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판화의 방식을 떠올렸다. 판화는 이미지를 과감하고 투박하게 드러내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명암과 세부적 묘사를 생략하고 두터운 외곽선을 강조 한 이런 표현 방식은 ‘상징’을 또렷하게 만든다.
판화는 검은색 먹이 강렬하지만 그 반대에 칼로 파내어 찍힌 하얀 선이 있다. 나는 이 흰 선이 늘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검정선은 무겁고 비장해 보일 수 있지만, 흰 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수채화 특유의 맑은 정서와도 어울리지 싶었다. 수채화는 종이의 흰색을 가장 밝은 상태로 남기면서 채색해 가는 방식이다. 종종 붓으로 물감을 칠하다가 남겨진 공간이 자연스럽게 하얀 선처럼 되었는데, 그때 남겨진 하얀 선이 매번 좋은 기분으로 마음에 남아 있었다. 더 정확히는 하얀색 부분에서 어떤 선한 기운을 느꼈다. 하얀색 선. 흰 선. 흰 선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수채화에서 종이의 흰 부분을 남기는 방식으로 ‘마스킹’이 있다. 마스킹은 물감이 닿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은 부분을 가리는 방식이다. 마스킹 액은 점성이 강해서 정교하게 표현하기 까다로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 점성 덕분에 오히려 판화의 투박한 선처럼 그어졌다. 젊은 농부 캐릭터의 외곽선을 마스킹 액으로 그어나갔다.
농부의 배경으로 논이나 들판이 연상되는 장치가 필요했다. 풀을 하나하나 굵게 그려 넣으면서 바람이 부는 뉘앙스를 생각했다. 풀도 사람도 형태가 단순해지면서 특정 장면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보는 이가 연상할 수 있는 여지들이 보였다. 채색 한 종이가 마르고 마스킹 액을 살살 벗겨내니, 드디어 하얀색 선으로 그려진 젊은 농부가 들판 위에 서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럴싸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이 그려지다니!!
드디어 나의 그림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문을 연 것만 같았다. 취재와 사진자료로 그려질 수 없는 조건이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내어준 것이다. 매번 그림이 미숙한 결과로 느껴지면,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더라면, 미대를 나왔다면, 빛과 명암쯤은 이미 넘어서서 자신의 양식을 찾아갔겠지, 하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스스로의 그림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만들었다. 이때 발견 한 하얀색 선은 스스로가 바라던 그림체를 찾아갈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