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영 Oct 13. 2020

시각적인 문장 일러스트레이션

대부분 일러스트와 디자인 의뢰는 이메일과 전화로 시작된다. 말과 글로 전달되는 텍스트를 해석해서, 용도에 맞게 시각화 해내는 것. 그것이 일이다. 이미지를 그려내는 실력 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 경험과 글을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산이 크고 작업기간이 여유로운 경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 만나서 이야기를 듣거나 현장을 취재하면 상황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좋다. 그럼에도 돌아온 책상 위에서 홀로 자료와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은 이 일의 시작임에 변함이 없다.


수합 된 자료들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무엇이 첫 인상으로 남는지 감각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문장에서 남겨지는 인상이 구체적일 수록 작업이 잘 풀린다. 나는 자료 안에서 핵심단어가 무엇인지 잡아내는 편이다. 하지만 의뢰인의 설명이나 기획서에서 강조 된 단어가 반드시 시각적으로도 적합한 건 아니다. 개념적으로 다 아는 말이라도 시각적으로 표현되기 어려울 수 있다. 중요하게 꼽은 단어들이 과연 누구에게나 읽히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될 것인지 고민이 시작된다.   

   

<월간 옥이네> 작업 중 청소년의 베트남 여행이 주제였던 달이 있었다. 내용은 청소년 스스로 여행계획을 세우고, 방문지역도 미리 공부하는 자발적 해외여행 프로젝트였다. 이들의 여행사진과 메일을 읽고 ‘자발적 청소년 여행’에 밑줄를 쳤다. ‘자발적’, ‘청소년’, ‘여행’ 각 단어를 시각화 할 수 있는 단서를 찾으며 작업에 착수하였다.      


‘자발적’과 같은 형용사는 추상적이다. 누구나 자발적이란 말의 뜻을 알지만, 그려서 느껴지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추상적인 단어에 깊이 빠지면 그림이 난해해진다. 실제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명사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청소년’, ‘여행’처럼 시각적으로 좀 더 명확한 단어들에 우선 집중한다.      

건네받은 여행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며 단서를 찾는다. ‘청소년이 여행한다.’를 보여 줄 모습들을 사진에서 찾는다. 획일적으로 찍은 단체사진 보다 여행 중간 중간에 찍힌 사진들이 좋았다. 사진기를 쳐다보는 주인공보다 뒤에 슬쩍 등장한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구체적인 행동이나 표정을 수집했다. 사람의 몸짓만 잘 포착해도 청소년 여행의 뉘앙스가 전해지는 듯 했다.     


인물에서 필요한 만큼의 동작이 수집 된 이후부터는 베트남의 풍경을 보았다. 실내사진이나 길거리의 부분만으로는 이곳이 어딘지 전달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힘주어 찍은 단체사진이 쓸모가 있었다. 보통 지역의 명소나 유적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기 때문에 배경으로 충분히 이국적이었다. 건물에 적힌 이름을 구글에 검색하니, 베트남 근대 유적지로 추정되는 또렷한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구글에는 유사 이미지가 함께 검색되어서, 골목에 함께 있을 법한 다른 건물이미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인물부터 배경까지 하나하나 별도의 낱말들을 확보한다.      


리서치와 드로잉으로 시각적인 단어들이 두둑해진다. 이제는 하나의 화면에 어떻게 배치하는 지가 중요하다. 화면을 구성하는 단계에서는 어떤 질서로 묶어낼지 고민한다. 단어를 나열한다고 문장이 되지 않듯이, 하나의 시각적인 문장으로 쓰여 지기 위해 적절한 비유나 상징이 필요하다. 인물과 건물들을 감싸 줄 더 큰 단위의 그림으로 무엇이 좋을까. 도형이나 색을 크게 넣어서 묶을 수도 있지만, 추상적일수록 독자와 보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보편성이 성립되지 못한 비유는 화면을 모아내는 힘이 없다. 시각적인 비유는 보는 순간 독자를 직관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자발적’이란 형용사를 다시 곱씹는다. 청소년이 직접 꾸리는 여행 가방. 여행용 백팩보다 매일 학교에 들고 다니는 책가방. 그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배낭의 모습이 서툴지만 스스로 떠나보는 여행을 설명해주었다. 청소년에게 유행하는 가방 브랜드를 검색하여 화면 중앙에 크게 그려 넣었다. 지퍼를 열리게 그려서 가방 안쪽에는 베트남 건물과 국기, 이국적인 야자수도 그려넣었다. 배낭 주변으로 앞서 확보한 청소년들의 동작과 여행에서의 모습을 하나씩 배치했다. 따로 따로 모은 단어들이 하나의 인상, 하나의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밑그림이 만족스럽게 결정되고 나면, 그 다음은 눈과 손이 열심히 움직이는 채색의 시간이다. 구성이 좋으면 그리는 과정도 즐겁다. 음악을 틀고 작업해도 좋을 정도로 색도 즐겁게 차곡차곡 채워진다. 완성되는 과정이 바로바로 작가에게 확인된다. 이 그림은 <월간옥이네> 표지 중에서 잘 된 표지로 꼽힌다. 여행 다녀 온 학생들도 무척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아이디어부터 구성 채색까지 만족스러웠던 흔치 않은 작업이다.      


아무리 전달받은 자료를 여러 번 읽고 해석해도, 매번 납득할만한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제가 일반인에게 너무 생소하거나, 혹은 너무 알려져 있어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생소하면 생소한 대로 보편적인 비유를 밀고가기 어렵고, 익숙하면 익숙한 대로 사람들의 머리에 고정 된 이미지에서 벋어나기 어렵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구성이 빈약한 그림은 작업 내내 찝찝하다. 납득할 만한 아이디어나 구성없이 그리기에 진입하면, 스케치와 채색 과정 곳곳에서 유쾌하지 않다. 왠지 망하는 결과물로 뚜벅뚜벅 성실히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의뢰받은 작업은 어떻게든 평타라도 쳐서 마감기간을 지켜야 한다. 모쪼록 그림이 엉성해 보이지 않도록 세부 묘사에 힘을 쓰면서 무마할 뿐이다. 최선의 결과물은 아니지만 성의있는 그림으로 보이는 노력이 중요하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하고 스스로 많이 하는 질문은 ‘타인에게도 읽히는가?’ 이다. 내가 꺼낸 비유가 상대방에게도 과연 납득이 될 수 있을지 늘 생각한다. 과거에는 혼자 뜨겁게 써내려간 일기였다면, 이제는 독자에게 내보내는 완성된 글로서 고민한다. 사적인 느낌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편적인 문장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표현이 서툴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늘 그림은 더더더 잘 그리고 싶어진다. 새로운 외국어처럼 긴 호흡으로 만나고 있는 세계. 나에게 일러스트레이션은 그림으로 써가는 시각적인 문장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