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주저하다 받은 전화에서는 옥천이라고 했다. ‘옥천...’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지 모르겠는 나에게 “대전 옆에 있어요”하고서야, 멀리서 온 전화임을 알았다. 대전 옆 옥천,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서 뜻밖에도 그림을 의뢰하고 싶다고 하였다.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겠다는 급한 약속을 잡고, 다음날 뚝섬역 근처에서 전화를 준 김예림 기자와 장재원 편집장을 만나게 되었다.
예림 씨는 테이블에 내 책 <아직, 해가 저무는 시간>을 올려놓고 있었다. 책 덕분에 이어진 인연이었다.
“저희는 지역 잡지 <월간 옥이네>의 창간을 준비하고 있어요. 옥천신문에서 준비하는 월간지로, 신문보다는 긴 호흡으로 지역의 콘텐츠를 잡지로 담고 싶어서요.”
재원 씨가 설명해주는 잡지의 맥락을 따라듣다보니, 창간을 앞두고 남은 고민은 표지임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은 아무래도 모던하기 때문에 지역 정서를 담을 수 있는 다른 이미지를 찾고 있었고, 작품집에 담긴 내 그림을 보며 ‘이거다’싶어 연락하게 되었다고.
공식적인 첫 그림 의뢰였다. 이 제안이 본격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잡지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그림이 보여지는 장점이 컸다. 반갑고 바라던 제안이었다. 다만 정말 타인이 만족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매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아직 가늠되지 않은 걱정도 함께였다.
창간호는 이미 취재된 중학생 풍물단을 그려보기로 하고, 다음호에는 취재에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도 건네었다. 미팅이 끝나자 둘은 바로 옥천으로 내려가야 했다. 정말 나에게 제안하기 위해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온 둘에게 황송했다. 그냥 보낼 수 없어건너편 식당에서 콩국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콩국수를 기다리며 초면에 나눌 법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즐겨 듣는 음악이야기까지 주제가 넘나들 때 즈음, 예림 씨가 <새소년>이란 밴드를 소개해주었다. 처음 듣는 밴드의 이름을 찾아들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새소년>은 엄청난 히트를 쳤다. 예림 씨는 여러모로 촉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의 흥행은 아직이다.)
‘이걸 어쩌나..’
옥천에 돌아간 예림 씨가 풍물단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만 보고 그림을 구상하기는 역시 어려웠다. 풍물단이라 했을 때 내가 연상했던 이미지와도 많이 달랐다. 흔희 떠올린 이미지는 흰옷과 색동 장식을 입고 신명 나게 연주하는 활력 있는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사진에는 애띈 얼굴의 학생들이 청바지와 반바지, 편한 옷차림과 편한 자세로 교실 여기저기 앉아 각자의 악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사진에 촬영된 이미지들을 수합할 수 있는 능력이 이때의 나에게는 없었다.
한 동안 모니터 속 사진만 이리저리 넘겨보다가 단체사진에 머물렀다. 학생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명랑했다. 풍물은 표현할 수 없었지만 청소년의 맑은 얼굴들이었다. 사진을 골똘히 보며 어떤 자세로 친구들이 조우하는지, 감추고 싶은 옷의 어색함, 그날 신은 양말과 슬리퍼의 색깔까지 더 세심하게 살피게 되었다. 세부가 선명하게 쌓이니 하나의 맑은 인상으로 형성되어 갔다. 손의 표정, 발의 표정, 옷의 표정 등 인물들이 완성되면서 하나의 뉘앙스를 전하게 되었다.
그림은 책에 인쇄되면 작은 흔적까지 다 드러난다. 인쇄기술이 좋아져서도 있지만 책을 눈 가까이 들고 보기 때문에 별거 아니라 생각한 흔적들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대체로 ‘출력(Publishing)’이 최종 단계이기에 그림의 외곽선과 형태를 더 말끔하게 정돈하며 그려야 했다.
꼬박 3일을 그려서 완성하였다. 스캔하고 디지털 보정까지 마친 첫 번째 일러스트를 메일로 보냈다. 보름 정도 지나 <월간 옥이네>의 창간호가 집에 도착했다. B5 사이즈에 세로로 인쇄된 그림은 내가 그린 원본의 1/5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들인 수고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처음 의뢰받은 그림을 무사히 납품한 결과가 중요했다.
지인의 필요로 그림을 그려준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안 좋은 경험으로 끝났었다. 타인의 필요에 맞춰 그려내는 그림은 다른 종류의 작업이었다. 처음엔 서로 선한 취지로 시작되지만, 결국 상대의 맥락이나 마음에 들게 그리는 일은 어려웠다. 여러 상황을 소화하고 그려낼 만한 표현력이 부족했고, 인쇄에 적합한 이미지 보정 등, 기술적으로도 준비되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월간 옥이네>의 표지 작업이 여러 달 반복되자 일하는 흐름이 보였다. 구상과 스케치에 하루, 채색 및 마무리에 이틀, 제작 크기는 인쇄 대비 1.5배 등 일로 꾸준히 가능하도록 몸에 익혀갔다. 첫 번째 의뢰인과 함께 그림을 제때에 완성하고 안정적으로 보내는 과정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그림을 의뢰받는 본격적인 일의 세계로 한 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