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영 Sep 30. 2020

그것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야


어린이는 크레파스로 삐뚤게 그려도 표현이 당당하다. 주변 누구도 그걸 못 그렸다 하지 않으며, 그림이 어떻든 완성하면 칭찬받는다. 그리기와 만들기에 거부감이 없던 어린 시절의 미술은 언제 어떻게 위축되어 사라졌을까. 내 기억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날 즈음이였다. 어느 방학이 끝나고 누군가 미술학원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가져왔다. 선생님은 그것을 진심으로 칭찬하였고, 곧 교실 뒤편에 전시되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교실과 복도에는 그렇게 '배운 티' 나는 그림들이 액자에 걸렸다.


어른의 눈에 우수한 그림들을 지나치며 스스로의 그림이 부끄러워졌다. 어린이들은 각자의 복도와 교실 뒤에 걸린 그림을 보며, 한때 칭찬받던 자신의 그림은 사실 유치한 놀이 정도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의 미술은 전문 교육을 받는 친구가 해야 하는 세계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삶에서 하나의 언어와 가능성은 그렇게 닫혀버린다. 이따금 교과서 한쪽에 좋아하는 만화를 몰래 그리지만, ‘그림 못 그려요’하며 미술과 멀어진 시간이 길다.


“그림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다시 어른이 되어 그림에 이끌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서점도 그 분위기를 반영하듯 채색만 하는 컬러링 책, 매일 가볍게 시작하는 데일리 드로잉(Daily Drawing), 여행지의 풍경을 그리는 어반 스케치(Urban Schetch) 등 다양한 취미미술을 안내한다. 나의 경우도 몇몇 드로잉 강좌나 워크숍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시작하였다. 교사들은 대체로 어른들의 위축된 그림에 용기를 주려 노력했다. 미대에서 배운 지식 중 일부를 알려주며 꾸준히 그릴 수 있도록 독려해 주었다. 잃어버린 그림의 낭만과 재미를 회복하는 시간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런 수업들은 길어야 두 달 남짓이라 한계가 있었다. 시간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르치는 언어가 체계적인 교사는 만나기 어려웠다. 소실점, 명암과 투시, 해부학 등을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도였다. 혹은 그런 구속에서 벋어나 자유롭게 그리자고 선언하지만 커리큘럼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카데믹함을 답습하거나 파격은 있는데 교육론은 갖춰지지 않은 수업은 엉성한 전시로 늘 끝을 맺었다.


미술관에는 고흐의 투박하게 일렁이는 유화, 변기를 갖다 놓은 뒤샹, 도형만 그려진 구성주의, 설치미술, 사진, 영상까지 범위가 다양하다. 미술의 스펙트럼이 이토록 풍요로운데 왜 교실로 진입한 언어는 얄팍할까. 여러 교사를 만나보며 수긍한 점은 미술이 가르치기 꽤나 곤란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보는 체험, 본 것을 느끼는 마음, 표현해내는 손의 기술, 세 가지 축이 맞물리며 태어나는 장르에서 작업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일하게 체계를 가지고 남겨진 미술교육이 르네상스 시대의 기법들이다.   


르네상스는 신이나 왕처럼 절대적인 존재, 하나의 질서를 믿는 시대였다. 그런 사고가 미술에 연결되어 이 복잡한 세계가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도록 만들어진 기법이 소실점이다. 세계가 화면에 재현되고 시선이 몰리는 곳에 신이 그려졌다. 종교와 권력을 찬양하도록 구현된 미술이다. 긴 세월 동안 왕과 신을 위한 미술로서 지원을 받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이 집요한 양반들이 해부학과 투시 등 미술 체계의 정점을 찍었다.


나의 해부학 노트


하지만 이후의 화가들은 이 빌어먹을 소실점을 벗어나려 화실을 뛰쳐나갔다. 빛을 그렸고, 들판을 그렸고, 길거리의 사람 등 각자의 진리를 찾아 이젤을 들고 헤매었다. 이내 카메라가 등장하며 정교하고 똑같이 그릴 이유 따위 정말로 사라졌다. 화가들은 답답한 캔버스 조차 벗어나는 도전을 반복했다. 새로운 체계와 개념을 만들면, 누군가 다시 진리가 아니라며 멀어졌고, 또 다른 미술을 열어내었다.


각각의 시도들은 하나의 이즘(-ism)으로 정리되었다. 미술사와 평론가의 글로는 정리되었지만 그 다양성에 이름표를 붙이기란 여전히 모호하다. 아이의 열린 미술의 가능성은 바로 다양했던 미술의 역사 덕분이다. 하지만 다시 주눅이 들게 만드는 복도에는 여전히 아그리파 데생이 걸려있다. 미대 입구에선 명암과 소실점을 제대로 할 줄 아는지로 심사하며  권위를 유지한다. 기존의 것을 깨부수는 데에 방점을 찍으며 지나온 발자취와 모순되지만, 교육자가 가르칠 수 있도록 정리된 미술 지식은 드물어 보인다.


“그것이 그림의 전부는 아니야”      

길 위에서 만난 미술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 말을 해주었다. 힐스에 와서도 종종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명암이나 해부학을 더듬거리던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더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기존의 미술 방식을 쫓았고 거기에 갇히고 있었다. 현실을 재현하는 그리기를 벋어 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다.


소실점은 하나의 시선 하나의 그리는 방식일 뿐이다. 인간의 시선으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서구의 시선이다. 여전히 절대적인 질서 인양 사용되고 있음이 미술에 대한 왜곡과 혼란, 두려움 등 많음 문제를 유발한다. 새로운 미술을 열망하던 서구의 화가들은, 아프리카 토기에 그어진 투박한 선에 감탄했다. 고흐는 일본 무역선에서 포장지로 사용된 목판화를 주워다가 또 다른 그림을 꿈꾸었다.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감각이며 하나의 질서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억지로 근대화를 겪지 않고 살았다면, 서양의 우쭐함을 모르고 살았다면 그림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내가 명암을 모르고, 원근법과 투시, 소실점을 모르고, 사람을 보는 해부학을 모른다면, 거기에 주눅 들지 않고 다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림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서부터 다시 하나의 세계와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졌다.

이전 07화 선크림 향이 풍기는 계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