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초여름 나의 마음을 흔드는 풍경이다. 잎이 울창해진 여름의 나무들은 바람에 따라 연두 빛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면 마음이 설렌다. ‘솨아아~’하고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면, 그중 바람 한 자락이 나에게 불어오듯 가슴에 스친다. 바람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건 늘 흔들리는 나무이다. 나무들은 각자의 흔들림으로 바람에 호응한다.
드로잉을 시작하며 가장 많이 보게 된 건 나무였다. 변하지 않는 회색의 도시에서 계절에 따라 유일하게 변화하는 생명이다. 콘크리트와 함께 묵묵히 풍경으로 있지만, 어느 순간 꽃과 단풍을 보여주며 계절의 마디를 알려주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꽃과 단풍처럼 시각적인 변화가 도드라질 때만 나무를 보았지만, 지금은 모든 계절마다 나무를 유심히 본다.
나무의 선을 관찰하기에 겨울이 좋다. 잎 없이 앙상해진 겨울나무는 하늘에 검정 붓으로 그린 듯 줄기가 선명하다. 줄기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어떻게 허공을 향해 뻗어갔는지 느낄 수 있다. 나무 곁에 바짝 붙어서 밑동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타원 안에서 체계적으로 짜여있는 나무의 설계도가 또렷하다. 몇 번을 봐도 정말 멋지다.
2월이 지나갈 때 즈음 가지 끝이 바짝 오르기 시작한다. 가지 끝이 물음 머금고 연한 색채로 물드는데, 그곳에 꽃의 조짐이 있다.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착실히 꽃을 접어놓고 있다. 꽃봉오리를 시작으로 3,4월은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는 풍경을 놓칠 새라 정신을 바짝 차린다. 황홀할 정도로 꽃이 만개하지만 늘 그렇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꽃잎을 떨군다. 나무 본연의 목적은 바로 잎이라는 듯, 연두 빛의 세계로 가지를 채워간다. 이후 초록의 나무로 수개월간 우리 곁에 머문다.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소위 예술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교양이며 삶의 즐거움이다.’
공예와 미술교육에 힘을 쏟았던 존 러스킨이 한 말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 어떤 모습이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관찰하고 생각하는 일, 도시에서 쉬이 잃어버리는 감각이다. 뒤늦게라도 나에게 자연을 향한 감각을 열어 준 것은 드로잉이었다.
나무를 그려보려 연필을 쥐고 맞닥 뜨려 보자. 처음 마주하는 감정은 ‘막막함’이다. 살면서 무수히 봐온 나무이니 슥슥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리려고 하면 막막하다. 텅 빈 종이 위에서 느끼는 이 막막함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주저하며 나아가는 연필은 하나의 겸손한 목적으로 변한다. 저 나무를 충실하게 보고 종이 한 장에 잘 담아봐야지. 눈과 손으로 나무를 더듬거리며, 보는데 온전히 집중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흔들리는 나무의 인상 정도지만. 그려가면서 주변의 풀, 작년에 떨어진 낙엽, 벌레 이런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우하고 있는지 본다. 나의 시선을 끌었던 한그루에서 옆의 나무, 그리고 숲의 분위기로 시선이 번진다. 다시 그리던 나무로 돌아오며, 껍질의 무늬, 잎이 교차해서 짙어진 색, 줄기가 뻗어나간 궤적을 연필을 눌러가며 그려낸다. 나무에 저토록 많은 세부가 존재했구나, 세월과 함께 켜켜이 누적된 흔적이 그리는 손에 이어진다. 나무의 표면을 보고 있지만, 그 너머에 압축된 계절들을 읽게 된다.
종이 위에 머물며 보낸 시간은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르다. 셔터를 한번 누르는 시간과, 연필과 종이를 오가는 시간은 관찰의 밀도가 다르다. 정보와 기록으로만 생각하면 그림은 사진에 비하여 효용이 떨어진다. 각자가 스마트폰과 사진기로 찍어내고 인터넷에 쏟아내는 이미지의 양은 방대하며, 구글에서 지구 반대편 골목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무엇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조금이라도 머물러 드로잉을 한 곳의 정취는 사진보다 몸의 감각에 남는다. 눈으로 관찰하고 기억하는 감각은 사진을 찍으며 유실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려는 시간과 노력도, 효율적인 ‘인증샷’과 함께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해질 무렵, 해의 직사광선이 누그러지면 노랑과 분홍을 뒤섞은 색감이 내리쬔다. 나뭇잎과 줄기 사이로 빛이 부서지는 장면을 한 시간도 넘게 바라본다. 다시 솨아아 하고 바람이 불며 나무들은 각자의 흔들림으로 빛과 바람에 응한다. ‘이건 도저히 그릴 수 없겠구나’ 흔들리는 나무는 그려낼 수 없지만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본다. 비록 그릴 수 없어도 드로잉은 ‘보는 것’을 새롭게 느끼도록 해준다. 끝내 그릴 수 없음에도 “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는 문장에 다가가고 싶은 스스로를 만나게 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