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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Jun 29. 2017

일상을 밀고 가는 힘

프롤로그

겨울이 지나가기 전, 함께일하는재단 노조와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다섯명 남짓의 작은 조직이 되었지만, 2012년에 같이 목소리를 냈던 여운으로 만나게 된다. 나는 계약만료 이후, 그림을 그리고 지역예술활동도 하며 다른 페이지의 삶을 살고 있다. 사년가량 시간이 지났지만, 내 작가성의 발견은 노조와 보낸 시간에 있었다. 늘 더듬게 되는 기억이다. 내가 보낸 시간과는 다른, 재단의 부당해고로 긴 법정 소송을 견뎌온 노조의 시간도 있었다. 다행히 작년(2016년) 승소로 매듭이 지었졌고, 피해보상도 나왔다. 보상액 중 일부가 기금으로 출자되었고, 노조에서는 기금의 사용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연이 있는 돈이었고, 맥락이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금 설명을 들었을 때, 나의 주변 친구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짧은 노동조건으로 비영리, 사회적경제 영역에 접속했다 단절되는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호혜의 경제, 연대, 마을, 공동체, 아름다운 언어는 모든 조직과 사업에 쓰이지만 체감도는 얕았다. 특히 기금의 출처가 정부기관일수록, 노동을 약속할 수 있는 안정성이 취약했고, 서로를 야박하게 만드는 쓴맛이 남았다. 쌓인 연차가 짧은 활동가(실무자) 일수록 노동이 단절 되었을 때, 유효하게 체감되는 네트워크는 흐릿하다. 그 공백에 냉소가 들어서기 쉬웠다. ‘여기도 다르지 않잖아.’

      

월급, 프로젝트 사업비, 강사비, 일일 인건비. 소득이 발생한 이름은 다양하지만,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교환’하여 얻은 돈의 명칭들이다. 교환이라고 쓰니 노동은 마치 우아한 행위로 느껴진다. 필요로 할 때 나의 일상을 노동하고 싶은 조건에 내어놓고 기다리면 되니까. 하지만 대학교 졸업 전후로 취직이 유예 된 시간동안, 돈을 벌기 위해 ‘증명’해내야 한다는 현실을 학습하였다. 불안도 함께 각인되었다. 3년차가 되고 단체를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다시 어디서 월급이 발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학습 된 불안만 더 크게 느껴졌다. 나름의 경력으로 소득을 발생시킬 기회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회는 대부분 6개월에서 10개월 가량씩 일하는 프로젝트였다. 열심히 하여 내년 혹은 다음번 프로젝트와 이어지도록 ‘증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담보되지 않은 이야기였고, 오로지 열심히 해야 하는 자의 희망이었다.

                                (함께일하는재단 노조와의 인연/그림 https://brunch.co.kr/@noranseed/62 )


다시 월급이 발생하는 직장에 들어간 것이. ‘함께일하는재단’이었다. 가치로운 일도 하면서 안정성이 보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계약 서류에 ‘1년 프로젝트 계약직’으로 싸인 하면서, 정규직 전환은 큰 무리 없이 된다는 희망 섞인 말을 믿고 싶은 만큼 믿었다. 이 시기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조합원으로 활동한 이유로 나는 2013년 3월부로 계약만료를 맞이했다. 이후 서울시에서 ‘혁신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지급하는 100만원 전후의 월급을 받으며, ‘명랑마주꾼’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작게 작게 이어졌다. 노조를 포함한 과거의 인연들이 불러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은 늘 감사한 초대였지만, 단발적인 일의 성격상 ‘증명’에 대한 기대와 우려도 컸다. 몇 차례 해보고 나서야 ‘위험(Risk)과 책임’이 외주화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위험을 언제나 잘해낼 수 있다고 말해야 ‘전문성’있는 사람이 되었다. 압축 된 시간동안 퀄리티를 내야하는 일은, 의뢰하는 자도 해내는 자도 고효율이라 믿는 영역이었다. 모든 일에는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돈을 받는, ‘증명’해내는 과정은 동일했다.


‘명랑마주꾼’ 활동을 통해 도시에서 개인이 고립되어 가는 맥락을 가까이 보았었다. 더 이상 경제적 증명을 해낼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어떻게 사회적으로 고립되는지 구체적인 장면들로 남아있다. 추상적이지만 가까운 미래라는 생각이 짙다. 근거는 나에게 누적 된 불안정한 경험치로도 충분했다. 증명하지 않아도 돈이 주어지는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와 실험에 눈이 갔다. 노동과 소비로만 채워진 시간에서, 일상의 존엄함을 지켜가기 위해서 필요한 이야기였다.


지리산 청년활력 기금과, 삼선재단의 청년활동 지원사업이 가까운 사례였다. 농촌으로 정착하려 이행기를 겪는 청년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기금이다. 한 달 50만원. 기금을 받는 청년의 맥락을 아는 주변인들이 추천해주는 방식이다. 기금을 받는 시간동안 어떠한 ‘증명’도 약속하거나 요구받지 않는다. 청년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기록하여 공유하고 있다.

(지리산 청년활력 기금 취지 http://jirisaneum.net/eum_news/13631)     


기금 이야기를 주고받던 몇 번의 만남 중에, 라오스의 탐디 (이선재 선생님)와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라오스에서 일상을 꾸리며 바라 본 한국사회와 청년, 시대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이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지금,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본다고 했다. 이날 자리의 제목이 ‘일상을 밀고 가는 힘’이었다. 나는 일상을 밀고 '사는' 힘으로 알아들었지만, 가는 힘과 사는 힘, 둘 다 일상에 소중하다. 이날, 참 진부한 말이지만 그래도 이 시대안에 ‘사람’이 남아있음을 보았다.     


기금 이름으로 ‘일상을 밀고 가는 힘’을 가져왔다. 매월 50만원씩 세 명의 젊은이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을 모았다. 가장 크게 생각한 것은 ‘기록’이었다. 기록과 미디어(창작)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명랑마주꾼’ 활동을 통해 만난 도리(우민정) 연다(천다연)를 노조에 추천했다. 노조는 나를 추천해주었다. 도리는 글을 쓴다. 노리단, OO은대학을 통해 기획자로 사회적경제 분야의 자원과 노동의 범위를 밀도 높게 겪었다. 한 해를 좀 환기하고 싶어 했기에 기금과 서로 맥락이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연다도 OO은대학, 명랑마주꾼을 통해 ‘서울시’ 일을 했다. 공공 자원을 통한 노동이 주는 분절감과 아쉬움들을 안고, 지금은 마을로 들어갔다. 해남에서 나고 자랐기에, 더불어 산다는 모습을 몸으로 알고 있는 친구이다. 내가 머리로 학습한 것과 분명 다른 감각이다. 이제는 근황이 멀지만, 연다가 가진 기록에 대한 애정을 신뢰하며 연결하게 되었다.      


기금을 막상 받는다고 생각해도, 아직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까지는 뚜렷하지 않다. 그걸 생각하다보니 역시 ‘증명’에 대한 습성이 몸에 베어서 인가 싶었다. 통상 한 달의 말미에 나가야 할 비용과 들어 온 소득을 숫자로 확인하는데, 아마 그 순간의 안도감일 것이다. 구체적인 일상의 장면과 심리적인 느낌이 연관 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기금의 맥락은 노동에 있고, 각자가 살아 온 삶, 형성 된 성격, 사회적경제 언저리에서 겪어 온 노동의 맥락과 닿는다. 앞으로 꾸려나가야 할 일상의 단편들은 어디로 이어질까. 그 단서를 더듬어 시대에 흐르는 냉소를 거슬러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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