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의 운명을 관조하는 누군가 존재하는 걸까. 마치 ‘이날이 적당 하겠다’ 싶어 망치로 쿵하고 내리친 듯, 아버지는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버지가 떨어질 때 쿵 소리가 났다고 했다. 사고는 정말 예고가 없었다. 느닷없는 소식에 어머니가 가장 먼저 응급실로 향했고, 상황이 좋지 않자 두 아들에게 연락하셨다. 그날 아침, 나는 전시를 준비하다 칼에 손가락을 베었다. 깊이 베어 흐르는 피를 꼭 움켜쥐며 지혈했다. 굳이 그것이 불길한 징조였다면, 나는 알아차려야 했었다. 오후 일정을 마치고 전시장소로 향하던 길 위에서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비상등을 켜고 잠시 통화를 마치고 유턴을 했다. 아직 서울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많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맑아서 푸르고 붉음이 선명하게 번지는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었다.
중환자실 앞에 엄마와 형 그리고 나 셋이 모였다. 긴급한 진행상황이나 동의를 구해야 할 때만 보호자에게 설명해주고, 그 외에는 기다려야 했다. 어머니가 응급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직접 주민번호를 말하며 수속을 밟을 정도로 의식이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후엔 심각한 환자들 속에 자신이 있음에 몇 번을 놀랐고, 차츰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의사는 CT 화면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뇌를 크게 얻어맞은 ‘뇌좌상’, 혹은 외상성 경막하출혈이었다. 뇌 안에서 피가 조금씩 새어 나왔고, 평소 피가 탁해서 드시던 고지혈증 약이 출혈을 지속시켰다. 뇌의 이랑 사이로 피는 새로운 길을 찾아 흘렀고, 아버지의 육신과 운명도 이전과 다른 곳으로 꾸물꾸물 흘러가고 있었다. CT 화면은 해부학적 이미지만 보여줄 뿐, 그렇게 흘러간 삶이 어디일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못했다. 다만 출혈이 멈추지 않아 벌어질지 모르는 낭패의 가능성만, 사고 직전에 먹은 소고기 뭇국이 남아있는 위장으론 응급수술이 어렵다는, 그 새벽의 기로만 알려주었다.
문만 쳐다봐도 시간이 흘렀다. 의사가 열거한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갈래를 뻗었다. 첫째 날은 새벽에 응급수술이 있을까 봐 셋이 밤을 새웠고, 둘째 날은 형과 나만 대기실에서 잠을 청했다. 첫날의 긴장 이후라 둘째 날 밤은 잠이 쏟아졌다. 셋째 날 아침 CT 촬영 이후, 약물치료만으로 출혈이 멎지 않자 뇌수술이 진행되었다. 의사와 CT 화면을 보며 수술 설명을 듣고 동의서의 사인과, ‘잘 부탁드린다’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다 깎인 채 수술실로 들어갔고, 세 시간 만에 인공호흡기와 여러 주사관이 꽂힌 채 나왔다. 삼일 동안 아버지의 장면은 너무도 자주 바뀌었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슬펐다.
#2
재난의 목격자처럼 아버지의 상태를 접한다. 아침 회진에 의사가 보여주는 사진과 말들이 그날의 뉴스. 재난이 벌어진 뇌는 아직 붓기와 압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막연히 희망을 점치는 방문객들의 말은, 의사의 담백한 말과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두 말 사이의 혼란이 싫어 이제는 아침의 회진만 기다리고 최선을 다해 듣는다. 최선을 다해 낯선 언어를 이해하고 나면 더 나은 길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 앞으로 도래할 위험과 그로 인해 조치될 시술에 대한 말들을 머리에 담아 1층 카페로 내려온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를 골라 앉는다. 오늘의 소식을 체하지 않게 내 몸으로 넘겨내고 나면, 가족들에게 정제된 뉴스를 전한다. 마음에 맴도는 서늘함에 햇볕을 쪼이며 메시지로 꾹꾹 눌러 담아 적는다.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자리가 서늘함을 지워준다.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두 번만 허용된다. 오전 11시 40분과 오후 6시 40분, 면회시간 10분 전부터 경비를 담당하는 자가 규칙을 설명한다. 20분 동안 스티커를 붙인 1명만 교대로 면회가 가능하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경비의 통제로 면회는 경직된 분위기로 시작된다. 병원에 머문 지 이튿날 친척들에게도 연락하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짧은 면회 시간대에 친척들이 모였고, 교대로 문을 건너 나온 이들의 표정은 슬펐다. 먼저 겪었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이 장면과 상황은 타인의 표정을 통해 다시 각인된다. 애써 구석에 가서 풀어내고 난 눈물은 하필 그때서야 다시 났다.
깊이 잠긴 아버지의 눈이 길었다. 아버지의 잠이 얼마만큼 길어질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집에 있어야 했다. 형보다 소속이 자유로운 만큼 일상을 옮겨오는데 유연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는 일과만큼 작가로 꾸려 온 나의 작업도 중요했다. 그림 공부는 기약할 수 없어 학교에 휴학을 알리며 중단하였다. 내년 5월 전시를 기점으로 겨울, 봄 동안 작가 스스로의 연구를 시작하는 시기여서 아쉬움이 컸다. 그 계절은 유예되었다. 그래도 마감이 있는 일러스트 연재들은 이어갈 수 있도록, 형의 휴일에 맞춰 내가 서울 집에 갈 수 있는 시간과 마감 일정을 조정하였다.
병원과 집 사이 동탄 신도시를 매일 오가는 풍경은 삭막했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 고층 아파트 단지,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출퇴근 시간의 차량들을 헤치며 다닌다. 행여 제시간에 닿지 못할까 불안한 마음에 액셀을 밟지만, 도착해도 아버지의 눈은 여전히 길게 잠겨있다. 듬성듬성 심긴 가로수만이 계절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 풍경에서, 아버지의 길게 감은 눈꼬리만 따라 매일 병원을 오고 가는 일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