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탓인가? 새해를 맞았는데 감흥이 없다. 어렸을 적에는 새해 첫날이면 올해 어떤 일이 생길지 기대가 가득해 설레기까지 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설렘은 사라졌지만 나름의 계획과 희망으로 새해를 맞았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무덤덤하다. 지난해만 해도 코로나19 상황이 좀 나아지려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팬데믹 3년차가 되고 보니 마스크 없이 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고 그저 ‘새해가 별 건가 그냥 또 다른 한 해지’ 싶다. 코로나19로 미뤘던 계획도 이젠 코로나19를 상수로 두고 세우지 않으면 평생 계획으로만 남을 것 같다.
만남이 줄고, 개인은 고립되고, 미디어 소비는 늘고, 모두가 날이 서 있다. 어렵게 만나봐야 주식, 선거, 부동산이 단골 주제인데 실컷 떠들고 나면 비교와 한숨만 남는다. 지금이 아닌 다른 시대면 좀 나을까?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시공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어릴 적 보았던 공상과학 이야기 중 아직 실현되지 않은 건 타임머신밖에 없는 것 같지만 상상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질문을 던졌다.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는데 시대와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싶어요?”
빅뱅 시기에 우주 먼지로 태어나고 싶다는 사람, 고려 시대에 태어나고 싶다는 이도 있었고, 자식의 친구로 살아보고 싶다며 시간순서보호가설을 무시해 스티븐 호킹이 깜짝 놀랄 바람을 말한 이도 있었다. 결혼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사람, 쇼팽의 시대로 가 직접 연주를 듣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무언가를 원해서 선택한 이도 있고, 벗어나고 싶어 선택한 이도 있었다. 인상적인 답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이 좋다”였고 다른 하나는 “10년만 먼저 태어났었으면 좋겠다”였다.
“지금이 좋다”라고 답한 이는 정년이 보장된 40대 정규직 남성이다. 유연근무를 신청해 자녀를 등교시킨 후 출근하는 그는 서울 어딘가에 아파트를 한 채 보유하고 있으며 취미는 캠핑이다. 그가 굳이 다른 시대에 태어나 고생할 것 없이 “지금이 좋다”고 답한 데는 타고난 성격 덕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안정된 환경, 즉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0년 먼저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답한 이는 30대 초반의 남성이다. 이유를 묻자 “그때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고 했다. 마침 그 자리에 그의 바람처럼 10년 먼저 태어난 현재 40대가 몇 있었다. 대답을 듣자마자 IMF 외환위기를 경험해 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라며 그때는 입대 희망자가 몰려 군대도 줄 서서 들어갔다고 성화였다. 곧이어 닥친 금융위기에 기업이며 가게며 줄줄이 부도가 나고, 수많은 이가 직장을 잃고, 시급은 2000원도 안 됐던 암흑기라고 이구동성 그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30대인 응답자가 말했다. “그래서요. 그럼 기회도 생기잖아요.”
틈이 없이 고착되어 있던 사회 구조가 흔들리고 뒤섞이면서 비슷한 환경에서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 같다는 것이 답의 요지였다. 요즘 2030에게 기회는 주식이나 비트코인밖에 없다고 한다. 주가 등락에 삶의 기운이 좌우되고 만나면 온통 그 이야기뿐이란다. 가끔은 ‘이런 것이 인간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고 했다. 그럼 훌쩍 미래로 가면 어떠냐고 하니 미래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 않단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미래에는 더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나도 IMF 외환위기 때 대학을 다녔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한 동기들을 보며 부모님께 미안한 맘이 들기도 했고, 누구는 어디에 갔다더라 하는 소식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첫 직장에 입사하기까지 고민도 많았고 이력서를 백 번째 냈다는 친구를 위로하며 신세한탄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있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후배나 제자를 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우연히 늘 동경하던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꿈에 그리던 예술가와 명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작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고 있었다. 고갱과 드가는 미켈란젤로를 부러워하고, 미켈란젤로는 칭기즈칸 시대를 보고 싶어 했을 것이라 한다.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족스럽죠.” 그러니 타임머신이 발명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재를 황금기로 만드는 수밖에. 모두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새해를 맞으시기 바란다. 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