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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유럽연구소 Jul 22. 2021

왜 누군가는 살인마가 되는가

77명의 목숨을 앗아간 노르웨이 테러리스트의 어린 시절

노르웨이 테러 10주기다.

백야로 눈부신 북유럽의 여름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 사건, 77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백 명을 상처 입힌 오슬로 폭탄테러와 우퇴이야 총격이 벌어진 지 10년이 지났다.


2011년 7월 22일 오후 3시 25분,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중심가에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총리 집무실이 있는 17층짜리 정부청사가 흔들리고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먼지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거리에 쓰러져있었고 피 뭍은 구두와 옷가지, 돌과 유리 조각이 나뒹굴었다. 8명이 목숨을 잃고 209명 부상을 입었다. 목격자들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증언했다.


오후 4시 57분, 북동쪽으로 35km 떨어진 우퇴이야 섬에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도착했다. 섬에는 당시 노르웨이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의 청년 캠프가 진행 중이었다. 제복 입은 남자는 공지사항이 있다며 참가자를 섬 중앙에 소집했다. 모여든 600여 명 대부분 청소년이었다. 남자는 가방에서 자동 소총을 꺼내 난사를 시작했다. 69명이 사망했고 110명 부상, 그중 55명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금발에 파란 눈, 라코스테 티셔츠를 즐겨 입고 샤넬의 에고이스트 향수를 뿌리는 32살의 남자였다. 자신이 한 일은 "유럽의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운동"이며 잘못된 정책으로 조국을 배신한 노동당과 미래의 정치인을 학살해 노르웨이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는 형법 제22조가 규정한 긴급피난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라 불렀다. 좌파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답시고 계급투쟁과 복지를 포기했으며, 이민자와 여성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 백인 남성을 차별했다고 분노했다. 그는 진정한 노르웨이인이자 애국자로서 이민에 반대한다며 민족주의를 부르짖었다. 여성이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며 페미니즘에 맞서야 한다고도 했다.


남자의 변호사는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감형을 주장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인격모독 말라며 자신은 지극히 정상인 정치적 활동가라고 반박했다. 범죄심리학자와 전문가 그룹은 두 차례의 진단을 통해 남자가 반사회성 인격장애와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있으나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판정했다. 만약 그가 정상이라면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왜 누군가는 테러리스트가 되는가? 이후 노르웨이 사회는 살인마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시작했다.

그는 아동학대 피해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그가 한 살도 되기 전에 부모는 별거에 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임신을 후회했으며 아이를 삶의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것 같다며 모유수유도 일찍 끊었다. 어린 그에게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부부는 만날 때마다 싸웠고 아이를 돌보지 않았으며 밤새 울도록 방치했다는 이웃의 증언이 있었다. 동기들은 그를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로 기억했다. 그는 어린아이가 응당 받아야 할 애정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를 귀찮아했고 아버지는 그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친구도 없었고 변변한 연애도 해보지 못했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 아이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상하다며 아동청소년심리센터에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아이는 정서반응이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웃지도 않고 울 만한 상황에도 울지 않았다. 또래와 어울리려는 욕구가 없으며 정리정돈에 매우 집착했다고 한다. 당시 아이를 맡았던 심리학자는 보고서에 모친의 양육방식이 심히 염려스럽다고 적었다. 여자에게 심각한 정서불안과 우울증이 관찰되며 아이와 즉시 분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피력했으나 여자는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는 치료하는 동안 며칠만에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고 병원에 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담당의는 만약 그때 남자가 분리되었다면 다른 인격으로 성장했을 것이라고 했다.


여자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자의 모친, 즉 남자의 외할머니는 여자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세균에 감염되어 하반신 소아마비가 됐다. 이후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부친은 여자가 여섯 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외진 곳에 살았던 여자의 가족은 당시 사회복지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여자 역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지만 항상 엄마를 보살펴야 했다. 여자의 모친은 편집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늘 딸을 꾸짖고 탓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해 친구도 없었다. 여자는 17살에 가출했다.

노르웨이 사회의 결론은 “그는 우리 중 하나다”였다. 아동학대, 복지의 사각지대, 온라인 상에 난무하는 혐오, 차별, 잔인한 선동과 동조, 고립된 개인과 무관심에 대한 반성과 토론이 일었다.

나는 그들과 다를까? 내 안에는 우월감과 혐오가 없을까? 저 멀리 노르웨이의 일이라고만 하기엔 나도, 그도, 그의 어머니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리 사회는 ‘나는 너와 달라’를 개인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라서 '나도 너와 다르지 않아'가 내재화된 북유럽보다 어쩌면 변화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모든 변화는 인정에서 시작되는 법,

내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어. 그냥 방관하고 지나친 적도 많아. 나부터 달라질게.

이런 결심이 아마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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