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오랜만에 음악회에 다녀왔다. 이건음악회.
초청 악단은 뷔르템베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하일브론, 협연자가 무려 마이클 바렌보임(YES, 그 유명한 다니엘 바렌보임의 아들...그런데 왜 이작 펄만을 더 닮았는지 의문).
이건은 아마 우리나라 기업 중에 메세나에 가장 진심인 기업일 텐데, 이건음악회는 33회째지만 2012년부터 매년 아리랑 편곡 공모전을 개최해서 초청 악단이 수상작을 선정하고 첫 번째 앙코르로 연주하는 전통이 있다. 가끔 오케스트라 공연 마지막 곡이나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는데 오늘 들은 아리랑 편곡이 가장 좋았다. 한양대 재학생의 작품이라고.
마이클 바렌보임의 연주는 역시 좋았는데 프로그램 곡도 좋았지만 첫 번째 앙코르 곡인 아리랑 편곡 연주가 특히 좋았다. 두 번째 앙코르는 모차르트였는데 바렌보임이 제1바이올린 뒷줄에 들어가서 함께 연주했다. 협연자가 챔버 속에 들어가서 연주하는 모습 처음 봤다. 연주도 좋았지만 겸손한 태도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다.
R. Fuchs : Serenade No. 3 E minor Op.22
푹스 - 세레나데 3번 마단조 작품 22
음악회에서 모르는 프로그램 중에 좋은 곡을 발견하면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쁜데 이번에도 보물이 있었다. Fuchs 세레나데 3번. 마단조. 봄에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곡. 푹스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는데 작곡가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스스로 은둔하는 삶을 살았던 탓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 세레나데가 유독 사랑을 받아 “세레나데-푹스”라 불린다고.
1부의 마지막 곡은 힌데미트의 장송곡.
P. Hindemith : Trauermusik: Suit for Viola and String Orchestra
힌데미트 - 비올라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장송곡”
엘리자베스2세의 할아버지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5세의 서거를 애도하며 만든곡이다. 마지막 악장은 바흐가 임종 직전 작곡한 코랄 “나 이제 주 대전 앞으로 나아갑니다(Fü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 인용곡.
음악회 시작 전에 사회자가 힌데미트 연주 후에 최근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를 잠시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미리 안내를 했다. 연주가 끝나고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고 지휘자도 연주자도 관객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망자를 애도하는 그 순간이 예식의 일부 같았다. 눈물을 닦는 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뉴스를 볼 땐 화가 났는데 오늘의 묵념에서야 비로소 슬펐다.
월드컵 응원도 하지 말고 모임도 행사도 다 취소하게 하는 것이 추모일까. 삶은 계속 되어야 하고 우리는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잊으라고 하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이들은 늘 독재의 편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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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뷔르템베르크 챔버 오케스트라 하일브론 | Württemberg Chamber Orchestra Heilbro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