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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유럽연구소 Dec 31. 2022

이런 사람이 진짜 친구 :프로이덴프로이데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인지 이걸 보면 알 수 있다

 해를 마무리하며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고마운 사람,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 물론 놈놈놈도 있지만 굳이 떠올릴 필요까지는 없고.


관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어린 시절  붙어 다니던 친구, 영원을 맹세하던 연인도 멀어지고 시들해진다. 때로는 사고처럼 끊어지기도 한다.


나는 넓고 얕은 관계보다 깊고 좁은 관계를 맺는 편이다. 하나 둘 가까운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길게 이어지는 관계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었다. 프로이덴프로이데(Freudenfreude). 샤덴프로이데의 반대말이다.

 

사악한 즐거움 '샤덴프로이데'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해로운 기쁨’, 뉘앙스를 살리면 ‘사악한 즐거움’이다. 타인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즐거워하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한다. 경쟁 팀의 선수가 부상을 입었을 때 잘됐다는 마음이 드는 것,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고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다.


가까운 사이에도 이런 감정은 존재한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씁쓸함, 그러다 몇 년째 승진에서 누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아도 속으로 은밀하게 친구의 불행을 기뻐할 수도 있다.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지닌 가장 악한 감정이 샤덴프로이데라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샤덴프로이데를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불행이 닥치면 걱정이 든다.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든 돕고 싶어 진다. 불행이 닥치면 진정한 친구가 가려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가 선한 사람이라는 뜻일지는 몰라도 좋은 관계의 척도는 아니다. 천성이 따뜻한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면 순수하게 슬퍼하고 조건 없이 돕고 싶어 한다. 간혹 착한 사람 옆에 이상한 사람이 붙는 이유도 그래서일까.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은

'프로이덴프로이데'

관계의 생로병사를 겪으며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나를 정말 아껴주는 사람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가려진다. '프로이덴프로이데' 타인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마음, 샤덴 프로이데의 반대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만큼이나 나의 행운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람도 귀하.


내게 놀랄만큼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가족, 진짜 친구, 나를 소중히 여기는 동료는 어떤 질투나 의구심 없이 진심으로 축하하고 인정해 주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깝다고 여겨왔던 이들 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잘 될거야”하며 위로를 건냈던 이 중에 정작 내게 행운이 찾아왔을  시기 어린 비아냥을 건네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미소  얼굴로. 의아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또한 본능이고 당신이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할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표시다.


샤덴프로이데도 프로이덴프로이데도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하나가  강해지도록 개발할  있다.


연습을 하면 한쪽이 더 강해진다. 전염도 된다. 샤덴프로이데가 전염되면 무섭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느꼈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던 감정을 옆 친구가 꺼내어 표현하면 소극적인 동의로 시작해 시간이 갈수록 의심이 사실인 양 대범해진다. 사악한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은 그럴만하니까 그런 것이고, 상대의 행운은 불공정의 결과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행운, 잘 나가는 이가 누리는 권력이 내 눈에는 불평등이다. 그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은 정의, 즉 공정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가 퍼지면 누군가의 등 뒤에서 한없이 잔인해져 심지어 그 대상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프로이덴프로이데는 단순하지만 강하다. 상대가 오랜 노력 끝에 이룬 성공, 설혹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운일지라도 함께 기뻐해주고 응원해주면 선한 마음이 번진다. 긍정의 기운이 그 사람을 감싸 빛이 난다. 상대는 행운 앞에 겸손해진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샤데프로이데와 프로이덴프로이데가 함께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으로 안다는 점이다. 그래서 프로이덴프로이데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샤덴프로이데가 기를 펼 수 없다.

  

프로이덴프로이데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샤덴프로이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쟁의식이 보인다. 한국 교육의 동력이자 메커니즘인 경쟁은 친구가 잘해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동창과, 입사동기와, 이웃과, 본 적도 없는 엄마 친구 자식과 비교하며 나의 우위를 찾는다. 나와 남을,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기보다 무탈한 나의 현재에 안도하며 비교우위를 즐긴다. 세상이 온통 제로섬인 것처럼 누군가 잘되면 내가 뒤처지는 것 같고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면 불행의 할당량이 나를 비켜가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내’가 아닌 ‘그들’에게 불행이 닥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 괜찮으면 상관없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족쇄이고 불행이다.


어쩌면 내가 북유럽에서 배운 가장 큰 가치가 프로이덴프로이데일지도 모르겠다. 불행은 한 개인만의 몫이 아니라는 연대의식, 성취 역시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겸손 그래서 샤덴프로이데는 힘을 잃고 프로이덴프로이데가 자연스러운 문화.


불행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나’와 ‘그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 혼자 잘한다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저 멀리서 나타난 바이러스가 금세 전 세계에 번진 것처럼, 어느날 친구들과 웃으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 남의 불행에 예의를 표해 슬퍼하고, 남의 행운은 조건 없이 기뻐해주자. 그것은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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