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왕+천재 건축가+파생금융상품의 아버지
아바(ABBA), 이케아(IKEA), 복지국가, 노벨상, 즐라탄, 잉마르 베리만, H&M, 중립국, 볼보…
이 정도만 해도 주변에 스웨덴과 스위스를 헷갈려 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평균을 웃도는 상식 수준이다. 스웨덴에 대해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높은 자살률, 말괄량이 삐삐, 올로프 팔메, 비그포르스, 발렌베리, 헤닝 만켈 등을 덧붙일 것이다. (참고로 자살률은 잠깐 짚고 가자.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은 한국이다. 2015년 기준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4.1명, 스웨덴은 12.7명이다.)
자, 이쯤에서 자칭 스웨덴 전문가가 승부수를 던진다.
스웨덴의 경제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1920년대 이름 없는 변방 국가 스웨덴에 신화 같은 존재로 통하던 남자다. 스웨덴은 철광석과 우거진 숲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자원이 없는 춥고 척박한 나라였다. 하지만 크뤼게르의 명성은 전 유럽을 넘어 미대륙까지 퍼져 있었다. 그는 재계의 거물이자 이웃 유럽 국가의 총리와 왕래하고 미국 대통령이 자문을 구하는 인물로 알려졌었다. 개인적인 흥망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크뤼게르가 스웨덴 경제구조와 세계 금융산업에 미친 영향도 크다.
일단 스웨덴의 삼성으로 알려진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국민총생산의 30%가 넘는 비중을 담당하는 경제의 거물이 된 계기가 바로 20세기 초반 유럽을 뒤흔들었던 사기꾼인 크뤼게르 사건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상품을 보유하고 있거나 인수합병, 차등의결권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면 크뤼게르는 몰라도 크뤼게르의 발명품은 만나본 셈이다.
[밀레니엄]이라는 소설이 있다. 스웨덴에서 영화화했고, 할리우드에서도 제임스 본드로 알려진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됐다. 스웨덴의 언론인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작품이다. 총 10권을 계획했으나 작가가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해 3권밖에 나오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유럽에서는 지난 몇 년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 복지국가와 영구 중립국의 온갖 긍정적 이미지 너머의 스웨덴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내용 중에 기업의 인수・합병과 주가 조작으로 거부가 된 한스-에리크 베네스트롬이라는 사기꾼이 나온다. 동유럽 등지에 유령회사를 세워 놓고 투자자를 그러모아 초기 자본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연쇄적 금융사기를 벌이다 결국은 꼬리가 밟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이다.
책을 읽는 순간 이바르 크뤼게르가 떠올랐다. 베네스트롬의 이야기는 크뤼게르 삶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크뤼게르가 초래한 충격이 훨씬 크다. 그는 사기꾼 사업가임에도 스웨덴 정치・경제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름만 몰랐을 뿐 크뤼게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사기 수법은 당시 스웨덴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오늘날 투자은행의 대부분이 그가 고안한 금융 발명품을 팔고 있다.
크뤼게르는 ‘금융 절도의 다빈치’, ‘천재 사기꾼’ 등의 별명을 갖고 있지만, 주가조작‘꾼’이기 전에 유능한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칼마르 지역에서 성냥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크뤼게르는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 왕립공과대학(KTH)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20세에 기계공학과 도시공학 석사 학위를 딴 것을 보면 머리가 비상했던 듯하다.
초기에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 미국으로 건너가 철근콘크리트 건설에 관련한 특허를 스웨덴과 독일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들어온다. 크뤼게르는 들여온 특허 기술을 활용해 건축 회사를 설립해 성공 가도를 달린다.
당시 그의 회사가 지은 건물로 올림픽 경기장, 스톡홀름 시청, 스톡홀름 시내 고급 백화점인 엔코(NK) 등이 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도 도시의 이정표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우리보다 먼저 산업화가 진행된 유럽의 여러 도시가 여전히 고즈넉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100년도 더 전에 지은 건물을 부수지 않고 보수해서 쓴다.)
건설업을 통해 모은 자본금으로 크뤼게르는 투자사를 차린다. 먼저 아버지의 성냥 공장을 중심으로 여타 군소 성냥 공장을 인수한 후 스웨덴 내 성냥 생산과 공급의 독점권을 따낸다. 다음으로 이웃 나라 노르웨이의 성냥 생산 업체를 차례로 인수해 북유럽 성냥 시장을 접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인 독일의 성냥 생산과 판매의 독점권을 얻는다.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성냥의 쓰임새는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다. 난방・요리는 물론 조명 등의 점화에 두루 쓰이는 성냥은 전천후 생활필수품이었다. 초기 성냥의 점화 부분은 황으로 만들어 색이 노랬는데, 독성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불이 너무 잘 붙어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크뤼게르는 점화 부분을 개량해 가연성을 낮추고 성냥갑 바깥에 거친 점화 부분을 붙였다. 새로 개발한 성냥은 ‘안전한 성냥’임을 내세워 홍보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붉은색 성냥 머리가 이때 나온 디자인이다. 크뤼게르의 안전한 빨간 성냥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크뤼게르 성냥은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이 ‘성냥왕’이었다 .
성냥은 스웨덴의 수출 품목 중 가장 중요한 제품이었다. 당시에도 특정 산업, 특히 생필품의 독점 생산권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뤼게르는 넘치는 자본을 국가에 대출하고 그 대가로 성냥 독점 판매권을 얻어 냈다. 독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독점권을 따냈다. 안전한 성냥을 출시한 이후 크뤼게르는 세계 성냥 시장의 75%를 점유했다. 생필품의 생산과 판매 독점권을 가진 그는 스웨덴과 미국의 큰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다양한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한다.
제지(SCA), 금광 채굴(볼리덴), 은행(스칸디나비아 신용대출회사) 등 1931년 당시 그가 손을 댄 기업이 무려 2백여 곳에 달한다. 특히 그가 보유한 채굴권은 세계 철광 시장의 50%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전화(에릭손), 탄광, 철도, 목재, 영화 유통, 부동산, 언론사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넘나드는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
크뤼게르는 공학을 전공했음에도 언변이 좋았다. 그가 호소력이 짙은 말투로 투자자들에게 한바탕 사업 설명을 하고 나면 투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분야를 점령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먼저 인수 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렸다. 저항하는 기업이 있으면 숨통을 조이는 방식으로 줄줄이 기업들을 병합해 갔다. 그렇게 자신의 회사를 독과점으로 만들어 가치를 띄웠다.
그는 다른 나라의 기업가 클럽에서 강연하고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의 초대로 백악관도 방문했다. 국제적인 거물로 통했던 그의 재산은 당시 3억 크로나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2조 원에 이른다.
물론 눈부신 성공 뒤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어느 누가 무슨 재주로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정직하게 일을 해서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금융시장에 대한 크뤼게르의 이해와 아이디어만큼은 금융 공학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가 돈을 불리고 굴리는 기술은 오늘날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등의 투자은행이 머리를 조아려야 할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가 개발한 금융 상품과 자산운용 기법은 현대의 투자은행이 지금도 두루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크뤼게르를 그 시초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크뤼게르는 빚도 자산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투자하고, 값이 오르면 그것을 담보로 또 다른 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계속 불렸다. 또한,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주식의 등급을 나누어 의결권에 가중치를 더했다. 오늘날의 투자사들도 소액 주주들이 경영권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순 투자 주식과 의결권이 있는 주식으로 주식의 종류를 나누어 판매한다.
그뿐만 아니라 독점으로 운영하는 성냥 공장을 미끼로 고배당을 약속하는 장기 무담보 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쓸어 담았다.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주식과 채권의 중간 개념인 주식예탁투자증권을 발급해 투자금을 모았다. 이는 당시로 치면 새로운 개념으로 해외투자가 막혀 있던 돈 많은 미국의 투자자와 해외 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미국 예탁 증권(American depositary receipt)이 같은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다국적 투자사인 JP모건이 초기에 이 방법으로 해외투자를 시작했다. 또한,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대비해 네덜란드 길더와 미국 달러 두 종류로 지급 수단을 요청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그리고 그가 소유한 수많은 기업 간의 거래를 회계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임의로 처분하는 식의 장부 외 거래(off balance sheet financing)를 통해 당국의 규제를 피했다. 쉽게 말해 자회사의 재무 상황을 모기업의 재무제표에 표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시작한 이 관례는 오늘날 그 수치가 50% 이하의 주식을 보유한 경우 투자로 인식해 그 자세한 재무 상황은 보고할 필요 없다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크뤼게르식의 회계 관리는 투명하지 않은 자금 흐름과 무분별한 투자를 불러 부실 경영을 낳는다. 기업의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보니 한없이 부풀려지기도 한다. 2000년대 세계적 경제 위기를 초래한 엔론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회계 처리를 했다. 1백여 년 전 이미 이런 식으로 투기했다는 점에서, “사기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는 크뤼게르의 별명은 무색하지 않다.
실물경제가 움직이지 않는 금융시장은 투자가 투자를 낳아 계속 돌아간다. 순환 출자의 함정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경기가 활황일 때다. 거품에 의존한 이 사슬이 어느 시점에 그 속도를 멈추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진다. 크뤼게르 왕국도 그랬다. 1929년 월가의 주가 대폭락과 경제공황으로 그의 투자 사이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뤼게르 왕국이 붕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에릭손이었다. 그는 1930년 그가 갖고 있던 에릭손의 주식을 미국의 전화통신기 제조 회사인 국제전화전신(ITT)에 팔았다. 국제전화전신은 에릭손의 경쟁사였다. 1932년 국제전화전신은 크뤼게르가 주식을 팔 당시 고의로 에릭손의 자산 상태를 부풀려 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계약을 무효로 하고 판매 대금(1천1백만 달러)을 환급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크뤼게르는 그럴 만한 자금이 없었다. 대공황이 진행 중이라 투자자를 모집하기도 어려웠다.
환급 요구가 있은 지 몇 주 후인 1932년 3월, 크뤼게르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었다. 크뤼게르의 죽음과 함께 그가 소유한 기업은 줄줄이 도산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스웨덴과 미국의 투자자들이 들고 있던 채권은 한순간에 휴지가 되었다. ‘크뤼게르 크래시’(The Kreuger Crash)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1933~34년 연달아 금융 규제를 위한 입법을 실행한다.
한편, 정부까지 나서서 크뤼게르에게 거액을 대출했던 스웨덴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나라 전체가 충격에 흔들리던 이때, 당시 사민당 대표였던 페르 알빈 한손은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자본의 규제와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아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이후 44년간 스웨덴에서는 사민당이 집권했다.
p.s.
이 글은 북유럽연구소의 책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 B컷(책에 포함되지 않은 원고) 중 하나입니다.
북유럽연구소 소장 @북극여우 입니다.
노르웨이, 한국, 스웨덴에서 공부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다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서 지속 가능 발전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재학 중 웁살라 대학교 대표로 세계 학생환경총회에 참가했으며 웁살라 지속 가능 발전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모 일간지 북유럽 통신원으로 일했습니다. 현재 북유럽 관련 연구와 기고, 강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북유럽, 지속 가능성, 양극화, 사회 통합, 복지국가, 자살, 예술, 철학 etc. 저서로는『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지도자들』,『라곰』(번역)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