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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유럽연구소 Oct 10. 2017

샤넬 No.5로 정착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대학생 되어서 처음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상큼하고 시원한 향이 좋았다. 달달한 여성 향수는 '나 여성스러운 여자예요' 하는 것 같아 간지러워 못 뿌리겠고, 향수 가게에 가서 이것저것 맡아보고 고른 첫 번째 향수가 버버리였다. 그것도 포맨. 지금도 좋아하는 향수다. 남자들은 헷갈려하고 여자들은 무슨 향수 쓰냐고 물어본다.

나의 첫 향수, 버버리 포 맨


그 담엔 쿨워터 포 맨, 겐조 플라워, 모스키노의 탱자 냄새나는 아이러브러브, 페레가모 인칸토, 오 드 까르띠에 이렇게 방황하다가 자연주의를 써볼까 싶어 록시땅의 마그놀리아, 허니레몬, 미모사를 기분따라 번갈아 썼다. 너무 가볍거나 달달한 건 취향이 아니라 전부 다 어느정도 무게감이 있는 걸로 계절 따라 상큼하거나 머스크 향 나는 걸로 번갈아 쓴다. 대략 샤워하고 나온 것 같은 냄새. 허니레몬은 그중 달달. 가을 겨울에 스웨터 입은 날 뿌리기 좋다. 요즘은 딥티크 좋더라.


나의 취향도 모르면서 선물로 준 랑콤의 미라클, 디올의 쟈도르는 동생 줬다. 흔한 대학생 냄새. 시스터 미안! :-) 동생이 선물 받은 비바 라 쥬씨도 좋았다. 동생이 들고 가서 이젠 못씀ㅠㅠ


끝까지 다 쓴 건 아닉 구딸의 쁘띠 셰리, 이세이미야키 로디세이 포 맨, CK be.

이 세 개는 지금도 좋아한다. 지나가다 누군가에게서 이 냄새가 나면 다시 본다. 좋아서.

특히 남자들...불가리 같은 흔한 거 말고 이세이미야키 뿌렸으면. 아님 딥티크. 플리즈.



몇 년 전부터는 아로마 오일을 썼다.

에센스 오일을 사서 손목이랑 귀 뒤에 조금씩 바르면 자연스러운 향이 나서 좋다. 한국에는 향도 다양하지 않고 비싸 외국에 갈 때마다 상점이 있으면 꼭 들러서 산다. 기본적으로 여름엔 페퍼민트, 봄/가을엔 라벤다, 겨울엔 유칼립투스. 특히 유칼립투스는 감기 예방에 좋다고 해서 들고 다니며 발랐다. 친구가 나더러 호주 가면 코알라한테 청혼받을 수도 있겠다고. >.<


요즘에는 패츌리를 한방울씩 뿌리는데 사람들이 내가 내가 지나가면 “어디서 향냄새 나지 않아요?” 한다.


그러다 샤넬 No.5를 선물 받았는데 처음에 한 번 뿌려보고 세상에 내가 여신도 아니고 이런 향수를 어떻게 뿌린단 말인가 싶었다. 어느 날 자기 전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문득 마를린 먼로가 샤넬 No.5만 입고 잔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나도 뿌려보았다.


이럴 수가.

처음 공기 중에 뿌린 거랑 몸에 뿌린 거랑 너무 달랐다. 재스민 향도 나고 고양이 냄새 같기도 하고. 머스크향을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못느꼈던 머스크향이 몸에 뿌리니까 났다. 신비스러웠다. 처음 맡았을 때처럼 여성스러운 느낌도 아니다. 베이스 노트에는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났다. 남자에게서 이런 향이 난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잠들면서 너무 행복했다.


자료를 찾아보았다

"재스민·장미·바이올렛·황수선 등 꽃의 향료에
사향(麝香)·앰버그리스(ambergris)와 같은 동물성 향료를 섞고
알데히드(합성향료)를 사용하여 향을 강화


내친김에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코코와 이고르>도 봤다. 디자인하랴 패션쇼 준비하랴 사랑하랴 바쁜 와중에 공을 들여 제작한 향수. 들고 온 샘플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4년도 넘게 조향사를 닦달해서 나온 24가지 향수 중 "이거예요." 하고 마침내 샤넬이 고른 것이 다섯 번째 샘플, No.5 였다. 그래서 샤넬 No.5란다.


꼭 맨살에 뿌려야 좋다.

향수가 체온과 만나 은은해지면서 뭔가 말할 수 없이 깊이 있는 향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 베이비파우더 냄새가 남는다. 향수 뿌리고 싶어서 샤워를 할 정도다.


가을이다.

오늘부터 샤넬 No.5로 정착.

목을 쭉 뻗고 바바리 입고 또각또각 걸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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