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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유럽연구소 Jun 11. 2018

구두쇠 영감의 대반전, 이케아 창업주의 유언

잉바르 캄프라드의 유언장 공개

이케아의 창업주인 잉바르 캄프라드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1943년 십 대에 잡화상으로 시작해 전 세계에 매장을 둔 가구 및 생활용품 제조유통사인 오늘의 이케아로 키워낸 사업가입니다. 캄프라드는 93년형 볼보를 폐차 직전까지 몰았고 레스토랑에 가면 소금과 후추를 집어올 정도의 엄청난 구두쇠로도 유명합니다. 그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블룸버그와 포브스 부자 순위에서 높게는 세계 4위까지 등극했던 슈퍼리치 중 한 사람입니다. 캄프라드의 재산은 평가 기준에 따라 다른데 적게는 750억 원부터 58조 원까지 편차가 큽니다. 세금 내는 것까지 아까워했던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몇 개의 재단을 통해 단계적으로 소유했는데 재단의 소유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캄프라드의 자산규모도 달라집니다.  


오랜 시간 캄프라드 가까이에서 일했던 이케아 재단의 사무총장인 페르 헤게네스 Per Heggenes는 2012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캄프라드는 돈 자체보다 이케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겁니다. 만약 캄프라드가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상장을 했겠지요. 캄프라드가 네덜란드부터 리히텐슈타인까지 곳곳에 주소지를 둬가며 복잡한 구조로 이케아를 쪼개 놓은 이유는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지배구조를 위해서입니다. 복잡한 소유 구조를 만들고 최종적으로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또 자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특정 개인이나 캄프라드의 후손이 이케아를 단독 소유하거나 좌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케아의 소유 구조 "이케아는 내꺼야, 영원히"



“100만 원짜리 좋은 책상은 어떤 디자이너라도 만들 수 있지만
2만 원짜리 좋은 책상은 뛰어난 디자이너만이 만들 수 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논란의 여지없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업가 중 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지 않아도 양질의 디자인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디자인의 민주화와 혁신 그리고 비용절감을 원칙으로 이케아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세계 최대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거부 명단을 보면 갖고 있던 기업의 주식 가치 덕에 부를 축적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이케아는 상장기업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캄프라드는 주식부자가 아닌 진짜 부자, 곳간을 고스란히 현금으로 채워놓은 부자라고 볼 수 있지요.  


인정은 받지만

존경은 못 받는 기업인

젊은 시절 나치 모임에 참가한 전력,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스위스로 이민을 갔던 일 등 발목을 잡는 과거 때문에 캄프라드는 스웨덴 안에서 그다지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스웨덴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이케아의 본사가 네덜란드에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여전히 절세와 탈세의 경계에 서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캄프라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캄프라드의 업적으로 특집을 내며 북적대는 외신과는 달리 스웨덴 매체는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이케아 매장에서도 구석에 작은 방명록 정도만 두고 간소하게 지나갔지요. 북유럽에서 가장 큰 괘씸죄에 해당하는 탈세 때문에 인정은 받지만 존경은 못 받는 기업인이었습니다.  


지난 1월 타계한 캄프라드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2014년 친필로 작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 재산의 절반은 4남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놀란드 발전 기금으로 사용할 것  
스웨덴을 크게 셋으로 나눈 지도. 북쪽 지역을 놀란드라고 부른다.

재산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이야 예상 가능한 내용입니다만 나머지 절만을 놀란드 발전기금으로 내놓다니! 놀란드는 스웨덴의 북부 지역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어떤 거부가 전재산의 반을 함경도와 황해도 발전 기금으로 내놓았다 보면 됩니다. 심지어 캄프라드는 남쪽 출신으로 놀란드 태생도 아닙니다.


놀란드 이케아 매장,

이민자들의 직장이 되다


그러고 보니 짠돌이로 유명한 캄프라드가 과거 이케아 내부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일이 있습니다. 2006년 스웨덴 북부 그러니까 놀란드 하파란다에 이케아 매장을 세운 것입니다. 스웨덴의 북쪽은 주로 탄광촌과 목재산업이 중심이 된 지역입니다. 스웨덴 전체 인구의 10~15%가 거주하는데 젊은 층은 다 도시로 떠나고 노령인구가 대부분인 곳입니다. 스웨덴 정부 주도형 이민자 정착지이기도 합니다. 하파란다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접경지역으로 정말이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수준의 OUT OF NOWHERE' 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환경부 장관이던 스벤 데릭 북트가 이케아에 매장을 내도록 캄프라드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캄프라드 스스로가 시골 출신이어서인지 지역경제와 젊은 층의 지역 이탈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지역 내에 사업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하파란다 이케아 매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하파란다에 문을 연 이케아는 뜻밖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스웨덴의 최북단, 그것도 핀란드와 국경을 맞댄 곳에 자리를 잡은 하파란다 이케아는 러시아로 향하는 이케아의 전초기지이자 물류창고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내 도시중 무역수지 3위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케아 덕분에 근처에 거주하던 이민자를 비롯해 고용인구가 크게 늘었고 도시가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돈은 이렇게 쓰는 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요? 탈세와 절세의 경계에 서서 경영했던 데에 대한 약간의 반성일까요? 유산의 절반이라고 해봐야 이미 대부분은 재단에 묶여 있어 수백억 원 수준이겠지만 구두쇠 영감의 유언 덕에 차디찬 스웨덴의 북쪽이 좀 바빠지겠습니다.


p.s.  

대한민국에 살면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말 자주 들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안 믿습니다. 기부한 돈으로 재단 만들고 가족 중 한 사람을 이사장으로 세우는 거잖아요? 오히려 부자들의 절세법이라고 하더군요. 캄프라드도 그런 방식으로 이케아를 소유했으니까요. 하지만 구두쇠 캄프라드 할아버지의 이번 유언장은 기억해주세요. 앞으로 사회에 환원할 때 원칙 하나! 사용처는 구체적으로, 둘! 돈은 제삼자에게 넘겨 확실히 다 쓰도록 하기.   


☞북유럽연구소 페이스북


북유럽연구소 소장 a.k.a. 북극여우입니다.

노르웨이, 한국, 스웨덴에서 공부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다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서 지속 가능 발전을 전공했습니다. 만학도로 없는 기력을 발휘해 재학 중 웁살라 대학교 대표로 세계 학생환경총회에 참가, 웁살라 지속 가능 발전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모 일간지 북유럽 통신원으로 일했습니다. 현재 북유럽 관련 연구와 기고, 강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북유럽, 지속 가능성, 양극화, 사회 통합, 복지국가, 자살, 예술, 철학 etc. 저서로는『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지도자들』,『라곰』(번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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