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맛]
내 얼굴에서 드디어 엄마가 보였다. 엄마표 스마일. 언젠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에서 리틀 란숙이가 있는 게 아닌가. 기쁘게도.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핸드폰으로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문자로도 심한 호들갑을 떠는 내게 엄마는 '날 닮은 게 뭐가 좋냐. 니가 더 예쁘제.' 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떻게 싫을 수 있겠어. 엄마는 내 첫사랑인데. 뱃속에서 열네 시간 넘게 버티며 나오지 않던 나를 기어코 불러낸 사람이 엄마인데.
그런데 우습게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내가 짝사랑 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넘치는 사랑한다는 말. 우리 가족 사이에선 신에게 말을 걸듯 조용히 속으로 삼켜야 하는 주문이었으니까.
그래도 한 줄기 미소면 됐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엄마의 시원한 입매와 굵게 쌍꺼풀 진 눈이 휘어질 때, 따뜻한 코코아로 장기가 녹아 흐물거리는 것처럼 내가 그녀의 딸인 게 아늑했으니까. 말랑하고 그을린 피부와 곱슬머리. 올리브 나무가 사람이 된다면 엄마 같을까. 엄마는 활짝 웃음을 피워내는 사람이었다. 퍽- 소리를 내며 터져버릴 것 같은 기운 찬 노란 전구처럼, 기쁜 일이 있으면 순식간에 프리지아 같은 미소다발을 보조개에 달았다. 삼겹살과 아귀찜, 옛날통닭과 소주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식물. 현관에 딸린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관음죽과 게발선인장을 잘도 키우던 마마 올리브.
그 마술적인 품에 안겨보고 싶었는데, 늘 눈가가 젖어 있는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나도 가끔은 어떻게든 쥐어짜듯 울어봤어도 좋았으려나. 울어서 주의를 끌면 끌렸으려나. 실제로 나는 양쪽 눈물샘이 막힌 채 태어나 안과에서 바늘로 뚫어야 했다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인공적으로 뚫린 샘이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알아서 울음을 길어 올릴 수 있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신 참고 참고 참다 지르는 비명은 크게 터뜨렸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지냈던 사글셋방. 그 집을 떠올릴 때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은 무수히 많지만 나는 크고 작은 바퀴벌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스스스슥, 바닥을 스치는 다리와 날개 터는 소리가 들리며 쿰쿰한 공기가 맡아진다. 엄마, 여기 참 지겨웠다. 그렇지?
두꺼비집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싱크대 아래 좁은 틈에서 러시아워 자동차처럼 뭉쳐있던 다리들. 낡아서 붕 뜬 바닥 장판 위를 밤이 흘린 검은 단추마냥 굴러다니던 녀석들. 나는 지금도 바퀴벌레를 무서워한다. 귀신같아서. 소리로 먼저 존재를 알리는 짓궂은 귀신. 그런데 그걸 피부로 제대로 감지한 적이 있었다. 부엌도 거실도 방도 이도 저도 아닌 좁은 바닥에 엄마와 내가 드러누워 있을 때 다리로 툭 떨어진 무언가. 기묘한 촉감의 주인은 아주 커다란 바퀴벌레였다.(그리고 훗날 정확히 그 자리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생겼다. 공사장 움푹 파인 땅에 발이 빠지는 바람에.) 쥐덫에 걸린 제리처럼 크게 비명을 질렀던가. 내 덩치가 훨씬 크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소소 소름 끼치는 촉감은 커다란 수세미 타월이 되어 인간 아이의 피부를 뒤덮었다. 녀석도 놀란 모양인지 더듬이를 흔들며 내 다리 위에서 재빠르게 꿈틀대던 걸, 커다란 손이 다가와 툭 쳐내고는 파리채로 시원하게 갈겼다.
짓눌려 터진 바퀴벌레 앞에서 엄마는 묘하게 심술이 난 것 같았는데. 바퀴벌레를 손으로도 슬리퍼로도 파리채로도 잘도 잡는 사람이었다. 나는 치한을 가리키듯 손가락을 휘두르며 새된 소리만 지르면 됐고. 그런데 그 툭툭 터지는 몸뚱이와 으스러지는 날개의 느낌을 엄마도 너무 싫어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왜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원했으면서 엄마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한참 후에 알게 되는 걸까.
'그때'도 마찬가지. 아빠도 말을 아끼고, 당사자인 엄마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 내 올리브나무는 뿌리부터 시들고 있었다. 동생의 찡얼거림과 나의 숫기 없는 애정결핍이 소금물보다 독했던 걸까. 새벽까지 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빛 한 점 제대로 들지 않는 검은 방에서 온몸을 벽을 부딪쳐 우릴 길러냈던 엄마. 방에 박힌 나무. 먹이고 입히고 씻기느라 가지가 다 끊어지고 있는 나무. 자식들을 위해 밥을 차리고 밥을 손수 떠먹여 주기도 하지만, 엄마를 위한 밥숟가락은 상 위에 없었다. 너저분해진 밥상을 정리하며 우리가 쓰던 수저로 남은 반찬들을 치우듯 끼니를 해결하는 게 점점 당연해졌고, 우리를 간신히 재운 후 정적이 흐르면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좁은 암흑은 못 견디겠다는 듯 현관문을 열고 나가 으슥한 밤 동네를 엄마가 울면서 헤엄치고 다녔단 걸 안다. 눈치채고 있었지. 이 방에 네 명이 나란히 누울 때까지 잠들지 않았으니까.
늘 퇴근한 아빠가 찾아오거나 한참만에 양손 묵직하게 장을 보고 돌아왔으니, 엄마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로 돌아오긴 했다. 언젠가부터 동네 사람들과도 교류가 뜸해지고 미행이 붙은 사람 마냥 밤에만 몰래 활동하더니, 결국 한 통의 전화를 받고야 만다. 한때 자주 왕래하던 동네 아주머니였다. "해서 엄마, 애들 데리고 밥 먹으러 와."
엄마는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뭘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감각이고, 무엇을 삼키고 있는지조차 인지하기 힘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그 아주머니댁에 너무 가기 싫었단다.
"안 갈 순 없잖아. 전화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밥 먹으러 오라 하고 끊는데. 너네들 데리고 같이 갔지. 너네 밥 먹이려고 눈 딱 감고 한 번은 가자 싶었지. 누가 차려주는 밥상 또 언제 먹어보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지금 기억도 안 나. 뭔 반찬이 있었는지. 그냥 그 집 식탁으로 가서 앉아가지고는 멀뚱하게 차려주는 것들 보고만 있었는데, 평범한 차림이었어. 그런데 딱 하나. 동치미. 첫 숟가락을 동치미로 떠서 국물 한 모금 들이키는데 세상에나. 시원하고 새콤한 거야! 맛이 느껴지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어. 그날 정말 오랜만에 밥을 다 비웠을 걸?"
이젠 너무 아득한 과거라, 회상하는 엄마의 표정은 오직 동치미만 그릴 수 있는 듯했다. 그 집 벽지도 사라지고, 반찬 그릇을 펼치는 아주머니 손도 사라지고, 동생과 나도 사라지고, 다른 말소리도 사라지고, 식탁 위엔 쇠숟가락과 말간 동치미만이 있는 것이다. 얇게 썰린 무가 물 위에 비친 불두화 뭉치처럼 화사하게 떠 있다. 젊은 엄마에게 그때 그 동치미는 생명수였을 것이다.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혈관을 적시며 구석구석 토막 난 감각을 이어주는. 엄마의 휘발된 입맛은 그날로 회복되기 시작했고, 무사히 나의 엄마로, 전보단 묽어진 미소로 돌아왔다.
동치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한동안 산문을 쓸 수 없었다. 서럽게 보채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듯 줄줄 샜던 나의 산문샘이 잠시 막혔다. 엄마는 정말 그날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하는 건지 뭔지) 늘 이렇게 단편적인 조각들만 딸의 귀에 톡톡 흘린다.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가까스로 파낸 귓밥이 도로 귓구멍으로 추락할 때처럼 버석거리는 굉음, 나만 아는 소리가 귀 안에 울린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다. 죄책감이 아니다. 속삭임, 잊지 말라는, 지난날을 옛날로 만들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
무섭고 무거웠으나,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서 발견한 엄마표 스마일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딸의 얼굴 위에서 만개할 수 있다. 혹자는 딸 안에 존재하는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고 그랬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웃을 땐 활짝 웃을 거다. 첫사랑을 어떻게 잊겠는가. 속 시원하게 울어보지 못했다 억울해하며 잘 우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날도 있었으나, 내 보조개에 뿌리내린 올리브나무를 힘껏 끌어안듯 온 얼굴을 써서 웃을 것이다. 더, 더, 닮아가서 엄마보다 호방하게 웃을 수 있는 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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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