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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Sep 26. 2023

[인생의 신맛] 너의 모든 미래를 믿어주고 싶어


[인생의 신맛]

너의 모든 미래를 믿어주고 싶어






지난 4월이었지. 네가 나에게 편지를 준 날. 봄이 시작될 때였구나. 그때 광주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고 벚꽃이 만발하기 직전이었어. 너는 멋쩍은 표정을 하고선, 분홍색과 노란색의 말캉이는 스트레스 볼과 함께 스윽 내 앞으로 봉투를 밀어줬지. '이런 봉투에 첫 편지를 써준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밋밋한 경조사용 규격봉투였어. 그날 나는 고맙다는 말보다 깔깔 웃어버리는 걸 먼저 했던 것 같은데, 오해하진 않았겠지? 한껏 격앙된 깔깔은 네 경직된 선의나 쑥스러움 가득한 다정함에 대응하는 나만의 방식이란 걸, 넌 알고 있을 테지. 진심으로 감격했고 기뻤어. 



M,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흘렀고 지금은 가을이네. 가을이 익어가고 있어. 광주로 넘어오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을 하염없이 보았는데, 벼가 노르스름해지고 있더라고. 큰 날개를 펴 활강하는 새들이 마치 가을의 눈썹을 다듬어주고 있는 것 같았어. 하늘이 어느새 참 멀리 솟았더라. 점점 높아지다 하늘이 열려서 거리와 건물과 사람들과 동물들이 죄다 우주로 날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 알아. 개소리야. 그럴 리 없겠지만, 서로를 혹은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날려버리고, 스러지고, 멀어지기 쉬운 이 계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 단풍이라느니 낙엽이라느니, 반갑지 않아. 그래서 오늘 나는 M 너에게 편지를 쓰려해. 이 계절을 가교로 삼고 싶어. 그동안 보내지 못했던 답장을 쓰는 시간으로. 



늦어진 이유를 잠깐 설명하자면, 처음엔 부담감이었어.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진 우리의 역사를 뒤져봐도, 편지를 주고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거창하고 대단한 마음을 돌려줘야만 할 것 같았나 봐.(그런 걸 질색하는 네 성격을 알면서도.) 다음 감정은 '자신 없음'이었어. M, 역시 너만큼 기발할 수는 없겠더라고. 그 봉투며, 편지를 건네준 타이밍이며, 함께 준 선물이 스트레스 볼이란 것도, 모두 내 상상력을 넘어서는 콘텐츠였어.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명확해서 편지를 쓸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 내가 혹은 네가 그 말의 진부함 또는 무거움에 상처 입을까 봐. 



나는 너를 진심으로 아낀단다. 너의 미래까지도.

너의 모든 미래를 믿어주고 싶어.



우리는 허구한 날 육성으로 카톡으로 '지구 망해라!'를 외치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다른 무고한 생명들에게 민폐일까 봐 눈치 보면서 '그래도 어쨌든 존버만이 살 길! 하루하루를 살아보자!' 하며 오호호 공허한 구호로 대화를 매듭짓지만. 정말 웃긴 일이야. 그토록 동생을 살리고 싶어 전전긍긍하며 청춘을 보낸 나도, 그토록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매며 방황과 좌절을 거듭한 너도, 너무너무 살고 싶은 사람들인데. 살아서 누군 시인이 되고, 살아서 누군 개도 키워야 하는데, 그치?   



M, 올여름 언젠가 내가 네 귀청이 찢어지든 말든 꺼이꺼이 소리 내며 전화로 통곡했을 거야. 그랬으면서 두 시간 만에 대화를 끝낼 땐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허헝 웃으며 끊었던 것 같아. 나는 화장실에 있었어. 화장실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아 하수구에 쌓인 엉킨 머리칼을 보고 있었지. 안 치운 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거기에 인형 눈만 달아주면 딱 쥐새끼꼴이었을 걸? 솔직히 그날 난 내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어. 아니, 이쯤 했으면 망가져도 된다고 생각했어. 더 솔직히 말하면, 완전 끝이니까 그간 쏟아내지 못한 히스테리를 다 쏟아내 버릴 거라고. 못됐지. 그런데 왜 난 죽지 않았을까. 어떻게 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몰골을 보고 다음 날 외출을 걱정할 수 있었을까? 전화 전후로 뭐가 달라졌길래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 더미를 치워냈을까?



여전히 모르겠어. 그냥 그때 M, 네가 전화를 받아줘서 다행이라는 마음만이 남았어. 온몸을 다해 울고, 그 여진을 느끼면서 침대에 드러누워 네가 준 말랑한 스트레스 볼을 주물렀지. 포근하고 순한 촉감. 이 공이 사실은 우리의 지구일까. 계속 찾게 되고, 파괴적인 마음으로 찢을 듯 늘려봤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탄력적인 표면을 살살 어루만지듯 쓸어보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그 공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어. 늘 머리맡에 두고 잤지. 공 한 번 봤다가 눈을 감고, 눈을 떠서 공 한 번 보는 나날이었어. 그것은 계속 그 자리에서 썩지 않는 자두 한 알처럼 빛이 났단다. 그러다 보니 가을도 왔고. 



M, 역시 나는 가을을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보고 싶어. 끝까지 싫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까지 싫을 수가 있나!'를 떳떳하게 말할 자격이 있을 때까지 여러 번의 가을을 맞이하고 싶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한숨처럼 나오는 '그냥 오늘을 사는 거지.'라는 말을 계속 뱉다 보니,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 일 년, 십 년이 됐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글쎄, 무슨 의미든 남지 않을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네가 남아 있으니. 몇 개월 사이 쓸모를 다한 그 동그란 공도 한 사람에게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으니까.  



오늘 이 편지로, 나는 우리 우정의 역사에서 나눈 몇 가지 경솔한 언행을 파괴하려고 해. 어느 한쪽이 어느 날 결혼이라도 하면 정신 차리라고 서로 뺨을 때려 주기로 했었지? 철회한다. M, 네가 누굴 만나 백년가약을 맺더라도 진심으로 기뻐할게. 네가 거절해도 축사를 담당하마. 변덕으로 개 대신 고양이를 키운다면, '나만 진짜 고양이 없어'를 울부짖으며 배 아파하다가  SNS를 거의 하지 않는 너 대신 네 반려묘 계정 @Chingu_daesin을 만들겠어. 그럴 에너지 없다면서도 늘 철새 같이 마음을 옮기며 덕질을 일삼던 네가 한 마성의 존재에 정착하더라도, 놀리거나 시간낭비라 여기지 않을게. 나도 잘생기고 아름다운 존재들에게 흥청망청 마음 쓰는 것이 즐겁단 것을 알아가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어느 날 또 홀연히 해외로 사라진다고 해도, 갑자기 뭔가를 배운다며 전혀 예상치 못한 공부에 임하며 수수께끼 같은 용어들을 쏟아내도, M, 너의 모든 미래를 응원할 거야. 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네가 선택하고 감내하는 모든 다음 이야기를, 펄떡이는 통통 튀는 이야기를 고대할게. 



그러니 우리 오래 남아 예상치 못한 인생을 허겁지겁 살더라도, '어쩔 수 없었어', '그땐 그래야만 했어', '최선이었지' 같은 진부하고 덜 어른스럽고 쩨쩨한 말을 나누자. 실패도 허심하게, 서로의 변덕과 변절에도 관대하게. 그러나 견고한 자두 씨 같은, 우리가 지켜낸 한 줌의 지구를 끝내 애정하면서.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_

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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