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서 Oct 19. 2023

[인생의 신맛] 질투를 잊는 법 : 나랑드 제로


[인생의 신맛]

질투를 잊는 법 : 나랑드 제로






제로. 값 없음.



바야흐로 제로 칼로리 시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이 말이 통하다니. 콜라도, 사이다도, 각종 블랙티도 분명 입 안에 넣었지만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식단 관리를 하는 사람이든 달달한 음료에 꽤나 미쳐있는 사람이든 우리는 죄책감 없이 꿀꺽꿀꺽 가볍게 음료를 삼켜도 된다. 



처음에 나는 탄산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제로 음료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찜찜했기 때문이다. 대체당을 넣은 액체라고? 그래놓고 콜라 같고 사이다 같은 맛이 난다고? 이상한데. 



원래도 단 음료를 즐기지 않았다. 치킨이나 피자를 먹을 때도 시원한 물을 더 선호했던 사람이었다. 목구멍에 고인 기름기를 날려줄 요량이라면 레모네이드도 아주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굳이 음식을 먹을 때 달달한 음료를 곁들여가며 입안을 더 혼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심리는 라떼류를 기피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우유 때문에 입안이 텁텁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라면 단맛이 치고 간 자리를 찜찜하게 여기는 날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여하튼, 그런 김해서가 편의점 문을 벌컥 열고 다른 코너엔 곁눈질도 주지 않은 채 직진한다. 서늘한 냉장 칸 안에서 볼링핀처럼 매끈하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음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랑드 사이다 제로가 보인다. 돌고 돌아 순정이라 했던가. 파인애플 맛과 그린애플 맛이 있지만, 역시 선택받은 녀석은 오리지널이다. 사이다 세계엔 이 녀석만 있는 게 아니다. 코카콜라 컴퍼니에서 제조되는 만큼 디자인이 매끈하고 트렌디한 스프라이트도 있고, 근본 중의 근본 칠성 사이다도 있지만 다 됐다. 내 기준 뒷맛이 제일 깔끔한 '나랑드 제로'만이 산책 메이트로 적당하다. 그렇다. 난 제로 음료를 걸을 때 마시는 건 좋아한다. 



천변 인근에 사는 주제에 웬만해선 '좀 걸을까?' 하는 생각도 잘 못할 만큼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다.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은 걸어야 한다는 상식을 알고 있지만, 지식은 삶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지혜로 전환되기 어렵다. 멍청한 나를 데리고 살기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이런 내가 움직였다는 것은, 나를 견디기 힘든 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대청소를 하거나, 불필요한 소비를 할 때만큼이나 충동적이면서도 어딘가 멀쩡하지 못한 선택인 것이다. 



나랑드라는 이름은 '나랑 드시지요'라는 말에서 파생됐다는 후문이 있다. 정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속 시끄러운' 나 자신과 함께 불광천을 걸으며 사이다의 뚜껑을 딴다. 나야, 나랑 드시기나 하자.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하얀 털뭉치와 오래된 양탄자빛 털뭉치들, 보기만 해도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풀씨, 길막을 하겠단 의도는 없겠지만 세상 느리게 걸으며 산책로를 점거하는 보행자, 덜 마른 빨랫감 냄새를 풍기며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러너. 모두 그냥 무신경하게 보낸다. 목 넘김만 의식하면서.  



톡톡, 입안에서의 탄산 기포 소리를 감각하다 보면 마치 쌀가마나 모래주머니가 터져 바닥에 내용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스산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소리를 꿀꺽 삼키는 울대. 뜨거운 울분을 삼킬 때의 통증과 유사하다면 우스울까. 그러나 나랑드 제로는 시원한 파도처럼 쌀도 모래도 눈물도 쓸고 가버린다. 파도 앞에서는 내가 나인 것도, 피와 살이 되는 중한 것도, 슬픈 사람인 것도 의미가 없듯. 이 제로 음료도 묵은 감정을 얼마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세련되지도, 상업공간에 널리 잘 유통되지도 않은 사이다인 '나랑드 제로'가 꼭 나 자신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치곤 좋게든 나쁘게든 아무런 영향도 없단 점에서 실속도 없다. 자격지심. 지금은 전보다 덜하지만 나 역시 이따금 무턱대고 '질투'를 느낀단 걸 고백한다. 잘생기고, 몸매 좋고, 글 잘 쓰고, 부자이고, 고양이를 키우고, 책을 맘 놓고 쌓아둘 정도로 집이 넓고, 어울리는 무리가 근사하고, 안정된 가정에, 호탕한 성격과 부끄럽지 않은 직장, 자랑할 만한 팔로워 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 이 조건들을 동시에 여러 개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 질투의 대상은 형체 없는 상상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뾰족하게 숙련된 능력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선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저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일뿐일 거란 감각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떨 땐 '아무렴 존재감 좀 없을 수도 있지' 하며 당당해지고.) 도시의 익명성을 갑갑해하며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바깥을 나도는 걸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우린 수시로 자아가 비대해졌다가 야위기를 반복하다. 존재감은 너무 쉽게 피어나고 지워진다. 고도로 발달된 도시 문명 안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란 사실을 주민등록증만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없다.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다리 위를 건너는 사람과 운동 기구에서 열심히 허리를 푸는 사람, 징검다리 가운데 멈춰 서서 오리를 구경하는 사람, 아이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걷느라 진땀을 빼는 사람. 이들이 존재하는데, 저렇게 존재하는데. 엄연히 잘 살아있는데. 무슨 장난인 건지, sugar free가 대놓고 적힌 캡모자를 눌러쓴 나도 여기 이렇게 있는데. 허탈감이 밀려온다. 텅 빈 마음에 산들거리는 바람이 들어찬다. 생각해 보면, 바람도 있고도 없는 무언가다. 나는 '바람'을 마신 것일까? 어떤 감정이든 섣불리 믿으면 안 되는걸까?



쌩하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자전거에 깜짝 놀란다. 나랑드 제로와 함께 하는 산책은 어리바리한 나를 더 얼빵하게 만든다. 기억나지 않는다. 왜 굳이 여기까지 걸었더라? 다이소나 가서 하수구 트랩이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음료를 들이킨다. 돌아세운 내 발걸음 소리가 사람들 틈속에서 보글보글 사라진다.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_

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

이전 05화 [인생의 신맛] 새벽은 신이 잊은 포도주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