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맛]
천장은 천 장의 종이다. 누워서 올려다보는 종이 위에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과 일기조차도 되지 못할 안타까운 헛소리, 억울함이 불러일으킨 철없는 저주가 새겨진다. 그러다가도 죄책감과 착잡함이 그렁그렁 수채화처럼 번지고,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가슴에 갇힌 언젠가의 뒷모습들이 덩이진 유화 물감보다 무겁게 얹힌다. 침묵일 때도 있다. 감색 잉크가 번지는 듯 꿈틀거리는 밤의 천장은 내 심장 안쪽에 자리하는 특별한 망막일지도 모르겠다.
불면증은 오랜 벗. 내 밤의 역사를 말할 것 같으면, 지금껏 만난 온갖 천장 벽지들과의 아이컨택부터 떠올려야 할 것이다. 유년을 보낸 사글셋방의 곰팡이 낀 천장, 십대 시절 내내 밤잠을 설치며 본 본가의 야광별 천장, 대학교 4인실 기숙사 2층 침대에서 바라본 너무 가까운 천장, 손바닥만 한 수첩보다도 작아 보이는 하숙집 방 천장, 언제나 옆에 사람이 먼저 잠들어서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바라본 숱한 모텔과 호텔 천장 등. 비좁은 과거의 평수를 계산하며 내 삶을 통과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복기해 본다.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은 오롯하게 나만 남은 시간인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언제일까. 멈춘 시계 안에 갇혀 뻑뻑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는 침묵을 받아들이게 된 건. 열대야로 찌는 여름이나 생리 전 불쾌한 밤에도, 통 트는 하늘빛이 벽지를 함락하는 광경을 억울함 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전장 한복판에 누워 있는 패잔병의 관점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내 운명을 아는 건 어렵지 않다. 여태 그랬듯, 미래에도 천장 아래에서 사죄와 희망으로 곤죽이 된 기도에 깔려 입을 다물 것이다. 평안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한결 편안해졌다. 새날의 승리도 나의 승리도 아닌, 승복의 검푸른 깃발이 주인공으로 우뚝 선 새벽.
'이제 다 좋소.'라고 말하고 싶을 땐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하는 것일까?
*
이맘때, 광주에 있는 나의 엄마는 하남공단의 모 공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 중일 것이다. 계란과 잘 씻은 사과를 먹고, 머리에 로즈힙 향기가 나는 헤어오일을 듬뿍 바르고, 핸드백에 작업복과 여분의 양말을 넣어 현관문을 나서겠지. 엄마는 9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심지어 어느 주말 아침 댓바람에도 걸었을 출근길을 오늘도 똑같이 걸으며 새벽안개를 마신다. 그리고 마치 흰 그릇에 물을 담고 달님께 고개를 조아리는 처자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손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다정하지만 연약한 남편과 서울서 혼자 사는 딸과 방 안에서만 사는 아들의 이름을 읊으며.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순차무사할 수 있도록 소리 내 읊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 내서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진정되었다고.
다소 겸양 없고 부실한 기도지만, 엄마의 진심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용이 어떻든 기도는 간절해진다. 귀찮아서 어영부영 시작하더라도 눈을 감고 마음 깊은 곳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점점 진심이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당신의 기도를 알고 있는 나는,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다치지 말고 밥을 잘 챙겨 먹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광주광역시 북구 어느 작은 아파트의 쪽문을 통해 걸어 나오는 중년 여성의 기도가 신에겐 보통내기들의 하찮은 읊조림 정도겠으나, 신앙 없는 내겐 계속 아른거리는 부모의 짠한 모습처럼 절대적이다. 엄마의 기도는 차가운 새벽 길바닥에 맥없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카톨릭교도인 아빠의 기도는 어떠한가. 죽음 이후에도 이어질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는, 소년의 마음을 가진 자의 기도는. 가족과 집과 생의 가치를 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도저히 '완전한 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의 염원. 겉으로 보기엔 아내의 기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듯 보이나, 생사를 초월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범부의 기도로 머물고 마는 걸까. 지고한 신이 아니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당신이 어떤 간절함으로 신성을 지키는지 알기 어렵지만, 아내가 공장일을 시작한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전신 마사지를 하고, 아내가 잠든 깊은 밤 계란을 삶고 사과를 깨끗하게 씻어두는 그 손을 믿지 않을 방법은 없으니까.
별도리가 없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모아 순박하게든 비굴하게든 참되게든 그저 기도하는 자들을 믿는 수밖에.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타자가 피로 이어진 살붙이에 그칠지라도, 뻗어나가는 마음은 반드시 빛처럼 더 넓게 밖을 비출 것이다. 함께 살았든 떨어져 살았든 부모를 평범하고도 귀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연민을 가질 수 있게 된 모든 자식들이 그 증인이고 사랑의 집행자다. 속된 미련도 바라는 것도 많은, 우리가 우리에게 전승한 새벽을 이기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꼭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 존재의 결백을 믿어보면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개복숭아처럼, 완벽하지 않아 누군가는 버리겠지만 누군가는 허겁지겁 먹을 작은 선 정도는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엔도 슈사쿠, <침묵> p.136
*
멀뚱멀뚱 천장을 본다. 나는 기도문도, 기도하는 법도 모르므로 간절한 온몸이 될 뿐이다. 어떤 날엔 썩은 통나무처럼 새벽의 끝으로 밀려난 외딴 몸이 좋기도 하다. 여명은 내가 사랑하는 황혼 녘의 푸른빛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된다. 곧 완전히 새로 태어날 것 같은 내가 된다. 어지럽다. 어디로든 닿겠지. 새벽은 신이 잊은 와인 창고에서 꺼낸 포도주처럼 그윽하다. 나는 삶을 마음껏 꺼내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침이 고인다. 주정인 듯 맑은 정신인 듯, 진실한 기도가 되고 싶은 기도가 지상에서 내내 울릴 것이다. 나의 본가, 그리고 새벽기도에 임하는 모든 교회당마다. 성스러운 콘서트.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밤은 들썩이고 살아있는 사람들로 인해 얇은 문풍지처럼 찢어진다. 어둠이 뒤덮인 좌절이라 봐야 할지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희망이라 봐야 할지 알 수 없는 색이 침실에 들이친다. 나는 행복하고 울적하게 가장 사랑하는 색에 안긴다. 그 품에서 필름이 끊기듯 잠의 수렁에 빠진다. 천장은 환해지며 순결한 종이로 돌아간다.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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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