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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Sep 11. 2023

[인생의 신맛] 희망, 아주 작은 존재의 눈 깜빡임


[인생의 신맛]

희망, 아주 작은 존재의 눈 깜빡임






아름다운 시인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매일매일 공들여 지내가자, 우리!"



지내가자. 

지내가자.



이 이상한 말을 곱씹으면 숨이 찬다. 딸을 지내가자. 누이를 지내가자. 지망인을 지내가자. 병을 지내가자. 가난을 지내가자. 슬픔을 지내가자. 나직한 구릉이 눈앞에 뜬 기분이다. 자박자박 작은 돌과 흙을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지내다'라는 말의 주체는 우리인 듯 보이지만 사실 시간. 시간이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머무는 어느 지점에 시간도 그만큼 머물러 주지 않으면 '지내다'란 말을 쓸 수 없다. 지낸다는 것은 시간을 업고 구릉을 건너는 셈이다. 나보다 더 멀리 가야 할, 그런데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끝내 알려 주지 않는 시간이 내 등에 있다. 나는 나보다 먼 곳을 알 수 없으니, '지내다'를 말해도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게 끝날 것 같은 막막함 감정이 먼저 덮쳐온다. 지내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은 등 위의 주인님 몫이기에. 나는 시간의 다리일 뿐이다. 



그런데 '-가자'가 붙자 종아리에 코스모스가 스친 것처럼 다리 근육이 흠칫 탄성한다. 지내가자. 잠시나마 시간의 악력이 쇠잔한다. 흘러가든 묻어가든 딸려가든 훑어가든 에돌아가든, '나아가는 행동'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다. 불쑥 발을 멈췄다. 정말 숨이 차서. 주변을 살핀다. 코스모스 말고도 울긋불긋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꽃과 나무, 젖은 이마를 식히는 미풍, 따라오는 듯 시비 거는 듯 윙윙 대는 꿀벌, 먼 데서 굴러오는 바퀴 소리를 감각한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머물고 싶은 마음도 전부 사랑이지 않을까? 나는 뒤를 돌아본다. 잠깐 멈추는 나도 '가는 나'의 연장선이라면?



공들여 지내가기. 자주 멈추면서. 매일, 업혀 우는 것을 어르고 달래며 다리에 힘을 줬다 풀었다 반복해 볼까. 리듬이 생기게. 이 구릉을 산보하며 노래, 시, 허밍, 나만의 음파(音波)를 빚어 작은 새처럼 날려볼까. 날려 보낸 새가 모험하고 온 언덕 너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가고 싶은 만큼 가볼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따뜻해지는 눈가를 군밤 만지든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눈이 데굴데굴 굴러 푹신한 풀숲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축축한 눈가를 닦으며 생각했다. 관계나 일, 내 감정에 압도당해 차라리 죽은 사람처럼 모든 것에 무감해지고 싶을 때, 영혼을 톡 쏘는 언어가 필요하다. '지내가자' 같은 언어가.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맛이 느껴지니. 감촉이 어때. 께느른한 혀 아래서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니. 매실 같은 심장이 보이니. 그래, 딱 그만큼 넌 조금 살아있단다. 



운이 좋게도, 나는 매달 모 온라인 플랫폼에서 [하루 한쪽 외면일기 쓰기]라는 리추얼로 작은 커뮤니티를 운영 중이다. 멤버들과 화상으로 만난 언젠가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글을 써서 너에게 좋은 점이 대체 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덜 가난해질 수 있어서'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높은 대출 이자율, 불안정한 수입, 아픈 가족과 시인 지망생 신분을 버틴 십 년, 개인적인 트라우마. 밖에서 보면 저는 위태로운 사람일지 몰라요. 하지만 잘 지내는 편입니다. 삼십 년 평생 부산과 광주와 서울을 거치며 무수한 장소와 사람들을 겪었습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제 언어는 제 삶을 품고 있습니다. 언어는 자산이고, 이것만 있으면 저는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고통과 결핍도 언젠가 또 다른 한 편 혹은 한 권의 산물로 만들어낼지도 모르지요. 마냥 쓸쓸하기만 하는 건 방만인 것 같습니다. 쓰는 만큼 삶은 진짜 내 것이 되고, '진짜'가 많아질수록 나는 덜 가난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말하지 못했다. 실수로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화르륵 붉어진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김해서 네가 뭐라고!' 세수인 척 뺨을 찰싹찰싹 때렸을지도 모른다. 느끼는 바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름난 작가도 대단한 야망이 있는 청년도 아니니 그럴 자격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난, 원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방황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태어나 처음 제대로 실감한 어떤 가치에 무릎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희망. 시간 위에 있는 유일한 것이 내게 허락된다.



몇 년 전에 외할아버지가 커다란 담금주병에 만들어준 매실 액기스로 부글부글 끓는 위장을 달래던 어느 날. 당신이 붙인 견출지 스티커의 담근 날짜 이후로도 나는 '잘 지내가고' 있단 걸 보았다. 그 사이 당신이 없어졌는데 당신이 여전히 나를 낫게 할 수 있음에 기분이 이상했다. 매실의 산도와 설탕이 뒤섞인 위스키빛 액체는 모든 것을 낡고 썩게 만드는 시간의 행진에 혼선을 일으킨다. 어느 여름, 망종 이후 당신의 검고 두툼한 손으로 나무의 둥근 꿈같은 알알의 매실을 병에 담고 흰 설탕을 폭설처럼 뿌렸겠지. 그 새하얀 눈더미가 당신의 언어였다. 당신은 무엇으로도 나을 수 없는 병을 폐에 짊어지고 사라지고 말았지만, 네, 알아들었어요. 그때 심어놓은 말. 고유한 억양은 녹지 않는군요.  



희망은 사랑의 눈 깜빡임을 갖고 있다. 

희망은 전부를 요구하는 욕망도, 나의 의도를 대변하는 믿음도 아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찬미로 가득한 눈, 아주 작은 존재의 눈 깜빡임일 뿐. 



아름다운 시인의 말처럼 외할아버지의 매실 담는 일처럼, 시간에 굳어진 언어와 근육에 구멍을 내며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콕콕 삶을 찔러보며, 죽음에 지지 않는 희망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싶다. 나는 지내갈 것이다. 작게, 기어코.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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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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