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맛]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한 진수성찬 가운데 내가 제일 흠모했던 것은 '슬러시'였다. 겉보기엔 카페에서 파는 스무디와 유사하지만, 값비싼 과일이나 요거트 따위가 들어간 게 아니므로 슬러시는 엄연히 슬러시다. 펩시나 환타 같은 새콤한 탄산음료로 질척한 얼음을 만들어 종이컵에 담아주는 게 일반적이다. 요즘은 뷔페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것이 된 모양인데, 라떼는 학교 준비물을 사고 남은 잔돈 200원, 300원이면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간식이었다. 파란 슬러시, 노란 슬러시, 갈색 슬러시 등 선택지는 다양했지만 맛은 거기서 거기. 그냥 내키는 색깔을 구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나는 소다맛 파란 슬러시를 좋아했다. 파란색이라 어쩐지 더 통통 튀는 신맛으로 느껴졌다. 자주 사 먹진 않았지만. 서두에 '흠모했다'는 표현을 쓴 데엔 이유가 있다. 당시에 사람이 먹는 것 가운데 새파란 것은 거의 없었다. 블루 레모네이드는커녕 츄잉껌이나 솜사탕도 하늘색 정도였지 노골적으로 파랗게 나온 건 없던 걸로 기억한다. 알고 있는 생생한 파랑이라곤 바다나 막 태어난 별, 호수, 불꽃, 트럭, 파란 크레파스, 체육복 정도였으니, 입으로 들어가는 것 중에 '파란색'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초딩 김해서 눈에 파란 슬러시는 독버섯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인 무언가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슬러시 제조 기계도 마녀가 끓이는 수프처럼 은밀하고 우아해 보였다. 그런 것을 그저 좋다고 마구 먹을 순 없는 일이다. 특별한 기분이고 싶을 때, 특별하게 시원해지고 싶을 때만 먹어야 하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아껴 먹는 어린이였고 결국에 친구나 동생에게 뺏기기나 했는데, 고작 슬러시 같은 것도 마음껏 취하지 않고 참고 참다 먹었다. 손끝에서 놓치는 슬픔, 망연하게 바라보는 슬픔, 속으로만 앓는 슬픔, 서성이는 슬픔, 다음 기회를 바라는 슬픔 같은 걸 너무 쉽게 알아버렸다. 누구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지만 만족을 유예했다. 대체 왜 강박적으로 지켰는지 모르겠다. 대신 또래 애들이라면 별로 궁금해하지 않고 무신경하게 씹는 음식, 시금치나 익힌 가지, 느타리버섯볶음 같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칭찬은 얻을 수 있었으니까.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식을 알아서 터득하여 자신을 지휘한다. 누구는 우는 법을, 떼쓰는 법을, 때리는 법을, 갈취하는 법을, 협상하는 법을, 유혹하는 법을 배웠을진 몰라도, 나는 저 멀리서 뺏길 일 없는 작은 것에 집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착실하고 소박했다. 발칙함이나 당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해한 아이 역할을 자처했다.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도 그냥 써버리지 않고 집으로 챙겨가는 그런 아이. 와중에 파란 슬러시를 어찌나 눈으로라도 열심히 훑었는지, 그 질펀한 얼음이 북극성처럼 내 가슴에 맺히기라도 한 것인지, 덕분에 나는 아주 낮은 온도에도 끓어버리고 마는 작은 어른이 된 것 같다. (음, 그런 아이를 엎고 다니는 등 굽은 노인이 된 것일지도.)
토베 디틀레우센은 『어린 시절』이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라고. 정말 그렇다. 냄새가 있다. 냄새를 넘어서서 맛으로까지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오랫동안 한 사람이 품고 있던 감정은 웅덩이가 되고 냄새가 고이고, 결국 흐르기 마련이다. 사람이 자라 어른이 되는 시점은, 새어 나온 유년의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키우는 때부터일 거다.
나는 어른이 되었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다를까. 여전히 나는 조약돌보다도 작은 것에 만족한다. 누가 거들떠보지 않을수록 기쁨에 오롯이 취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칭찬에 관심이 없어진 정도. 칭찬은 나를 지켜주는 무언가가 아니라 더 좁은 울타리에 가두는 평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부터는 그렇게 됐다. 나는 이제 칭찬을 위해 내 삶을 거래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 흘끔흘끔 보지 않는다. 아주 가까이 간다. 토끼를 잡듯 최대한 살금살금 다가간다. 수개월 고민하다 사고 싶었던 선풍기를 할부로 결제하기도 하고, 시로 써보고 싶은 단어가 생기면 몇 날 며칠 그 단어만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먼저 마음을 표현한다.
내 욕망의 끓는점은 파란 슬러시의 온도. 아주 낮은 곳에서도 달궈지기 때문에 세상은 우러러볼 것투성이다. 바보 같은 나의 유년, 그 아이에게 '슬러시' 정도는 원대로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내가 되고 싶다.
(...)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에게
제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우리는 소리를 친 적 있었지
윤은성, <선셋 롤러코스터>의 일부
언젠가 이 작품을 보고 울면서 시집을 덮었다. 탐탁지 않아도 이제 그만 소리쳐도 되지 않을까.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의 유년도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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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