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맛]
뽀드득뽀드득. 적당히 얼린 샤인머스캣을 입 안에 넣고 굴린다. 어금니에 힘을 줄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난다. 달콤함에 발을 푹 담근 채로 나는 우두커니 행복한 나무가 된다. 어찌나 단내가 진동하는지 코끝에 싱그러운 포도알이 열리는 것 같다. 냉장고 냉각기와 선풍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보다 더 크게 과일 부서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신나게 씹으면서 문득 깨닫는다.
"어? 나는 샤인머스캣 같은 너무 달기만 한 과일은 싫어하는데?"
그렇다. 과일에게마저 이상한 잣대를 들이밀며 '달달하기만 한 요즘 과일'은 근본이 부실한 과일이라며 꼰대적(?) 정의를 내렸다. 이를 테면, 샤인머스캣이나 물렁이 복숭아, 리치, 망고 같은 것들. (이 의견은 최근 철회했으니 다들 총을 내려놓으시길.)
생크림 케이크나 타르트 위에 얹힌 윤기 나는 과일들은 한때 경멸의 대상이었다. 시고 떫은 와중에 달달한 맛도 있어야 과일의 품격이 완성되는 게 아니겠는가. 한 가지 색상의 폭죽보다 여러 색의 컬러가 믹스된 폭죽이 터질 때 밤하늘이 더 화려하고 성대한 것처럼, 둔감해진 미각을 밝히는 것은 뾰족한 하나의 맛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맛이라 주장했다. 서로 다른 개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전개되는 향에겐 고급 향수 같다는 인상을 받는가 하면, 단박에 코로 직진하며 '레몬!' '코튼!' '로즈마리!'를 외치는 용액은 디퓨저나 섬유탈취제의 것으로 여길 테니 풍미를 따질만한 과일이라면 향수 같은 속성을 가질 거라고 여긴 것이다.
참개구리의 등판처럼 탈력 있게 빛나는 샤인머스캣 한 알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요리조리 살핀다. '나 예쁘지? 맛도 있다!'
단내가 요망하다. 곧바로 의문에 사로잡힌다. 어여쁘고 단 것 외에 다른 매력도 없는 이 과일. 왜 맛있지? 엉뚱한 질문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가까이 있다. 친구 Y이다. Y는 심한 독함을 앓고 후유증을 앓는 내가 아프랴 일하랴 시 쓰랴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남들 다 하는 고생인데), 대뜸 "아자뵤으!"라는 요상한 메시지와 함께 모바일 쿠폰을 보내왔다. 고당도 샤인머스캣이었다. 깜짝 선물에 내 눈도 샤인머스캣 알마냥 휘둥그레졌다. 하여간 사람 감동시키는 덴 뭐 있어. 타인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챙김을 받을 때, K-장녀 기질이 발휘되는 것인지 나는 '잘 받는 나'를 바로 꺼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온전한 감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때론 상대의 염려와 성의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검열하느라 허둥댄다. 나 이거 받을 만큼 죽을 정도로 노력하거나 아프거나 잘한 사람 아닌데. 하지만 Y는 먼 훗날 저승사자에게도 빈손으로 인사하지 않고 과일바구니를 내밀 인간. 자타공인 '선물요정'이다. 이미 끼얹어진 사랑에 어쩌겠는가. 속수무책으로 터지는 웃음을 가라앉히며 고맙다고 정성껏 회답할 수밖에.
Y를 만나면, 고통을 나누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해도 공허해지지 않는다. Y에게 선물을 받으면,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고마워할 수 있다. Y랑 메시지를 주고받으면, 이모티콘만으로 대화를 나눠도 흡족하다. 좋기만 한 관계.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달달하기만 한 관계. 그것이 건강하냐고 묻는다면, 놀랍게도 정말 그렇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민들레꽃을 선물 받은 날> p. 148
작가가 손자에게 품는 이 깨끗한 사랑. 무언가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걱정이나 수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뭔가를 예감하거나 분석하듯이 보지도 않고, 그저 가슴에 차오르는 사랑을 오롯하게 느끼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두고두고 다시 읽는 문장이다. Y의 산뜻한 애정에서 박완서 작가의 산문이 떠올랐고, 줄곧 그럴싸한 폼만 연구한 내 어리석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샤인머스캣을 받은 그날은 모든 것으로부터 줄행랑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영혼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에 쥐어 뜯기며 거열형 당하는 중이었다. 현실과 싸우며 중심을 찾느라 스스로 계속 물음표 말뚝을 박아댔다. '이게 맞아?' '이게 옳아?' '이게 최선이라고?'
어느 한 곳에 치우지지 않으면서도 전부를 지켜내야만 건강한 삶이라는 환상. 다방면의 감정을 두루 경험해야 사람의 기품이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내면의 닳아짐을 부상투혼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난 더 늙어야 하고 중심 잡기의 경지에 오르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 앞에서 믿음은 외풍 맞은 촛대처럼 나약해진다. 대체 사람의 중심은 어디에 있길래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는데도 허공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겪어야 하는가. 설마 인간의 삶이란 게 원래 떨어지고 기울어지는 것인가. 노인의 허리가 굽듯.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듯. 그것도 모르고 '진정한 가족이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진정한 사회인이라면, 진정한 나 자신이라면'이라는 틀에 갇혀 이들 전부로부터 낙제받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이 되려 했을까. 어느 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유일한 가능성일 텐데.
그리고 손바닥 위 이 초록빛 과실은 말한다. 더는 생각하지 마. 단 건 그저 단 것이지. '그렇지. 내가 견디는 내 하루를 어떠한 마음 없이 깨끗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질문을 자아내게 만든다. 손자가 가져다주는 민들레를 보고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작가의 마음처럼, Y의 마음을 한 치의 계산 없이 달게 받아들였던 나처럼, 힘들 땐 힘들더라도 기쁠 땐 삶이 꺾어다준 꽃이나 정체불명의 열매를 알아보고 그저 좋아하고 눈인사하는 지나가는 마음을 가져볼 순 없을까. 그들의 밝고 따뜻한 기품 앞에서 고작 과일 하나에 진정성을 운운한 내가 초라해진다.
순식간에 바닥난 옥구슬 같은 과일. 늦어도 한참 늦게 샤인머스캣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처음으로 '내돈내산 샤인머스캣'을 시전했다. 균형은 붕괴된 지 오래다. 이 달콤한 샤인머스캣이 은밀하게 암시해 준 것은, 삶은 한 알의 사과라기보단 청포도와 같이 알알이 탐스럽게 제각각 익어가는 한 송이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걔 중엔 턱이 아릴 정도로 달콤한 알도 있고, 껍질이 조금 뻣뻣하면서 떫은 알도 있고, 쿰쿰 눅진할 정도로 과하게 숙성된 알도 있지만, 어쨌든 샤인머스캣은 샤인머스캣이고 맛은 달다. 그게 샤인머스캣의 균형이다. 몇 개의 알이 시들하거나 상처가 났다 해도 못 먹는 과일 취급했다간 '너 뭐 돼?' 하는 소릴 들을 것이다.
얼기설기 제멋대로 열리고 지는 삶이라면, 뭐든 썩 괜찮다고 해주는 몇 사람이 곁에 있다면, 풍미나 품질을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일까. 훌쩍훌쩍 짭짤한 눈물과 함께 달게 삼킨 이 마성의 구슬은 내 위장에서 녹아 혈관을 타고 다니며 발효되겠지. 차곡차곡 쌓인 찬란한 연둣빛 즙. 좋은 포도주로 익어갈 수도 있으려나. 기왕이면 나는 거대한 술독이 되고 싶다. 인생의 쓰고 단 모든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와구와구 담을 것이다. 쓰고 창백한 시간이 있으면 하루종일 햇살이 단비처럼 내리쬐는 날도 있다. 훗날 다시 이 시기를 혀에 머금으면, 무르익은 생의 복합적인 신맛에 놀라게 될 지도!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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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