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맛]
나를, 무슨 일이 있어도 살고 싶은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많이 떠올린 사람이라고 하면 어불성설로 느껴질까. 매일 '죽고 싶은 삶'을 염려했고, 어느 날은 직접 죽었다가 다시 부활(?)해 '죽어보니 이렇더라.'며 세상에 알려줄 순 없을까 망령된 생각을 품기도 했다. 오랜 시간 우울불안장애를 앓아온 동생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를 떠올릴 때면, 사람 인생의 하루하루가 죽음이 쓴 일기 같았다. 썩어서 뼛가루로 남게 될 한 장 한 장의 나날들. 살고자 하는 마음과 죽고자 하는 마음의 간극이 속옷 두께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나조차도 못 미더운 힘없는 지푸라기가 되어 자주 펄럭였다.
오늘은 살고 싶고 내일은 죽고 싶은, 현관문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사람 곁에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겐 함께 아파할 에너지와 두 사람 몫의 고통에 지지 않을 에너지가 모두 필요하다. 게다가, 집 안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첨예한 무기로 보이는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책상 모서리, 주방세제, 옷가지, 젓가락, 라이터, 통조림 뚜껑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한다. '맙소사, 아니야, 진정해!' 따위의 말을 그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줘야 했다. 그렇다. 과거의 나는 죽음을 동경하지도 않으면서 매사에 그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지만, 무겁게 만든다. 너는 나의 치유될 수 없는 가벼움에 손상을 입힌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충동에 휩싸일 때면, 너의 얼굴이 생각나고, 나는 다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존재감이 커진다. 나는 너를 대신해 네가 더는 겪지 못하는 것들을 즐긴다. 죽은 너는 나를 더 살아있게 한다."
에두아르 르베, <자살> p.18
그렇다. 묘하게도, 스러지는 존재는 나를 더 살아있게 했다. 죽음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알 수 없는 미궁이 되어가고,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이 선명해지고, 그가 죽고 싶어 할수록 나는 죽으면 안 되니까,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이 됐다. 동생은 그런 바보같은 누이에게 의지하기보다는 경전 한 줄 한 줄에 기대 숨 쉰다. 어쩌면 지난 수년간 쏟은 나의 노력은, 복음서의 얇은 종이를 넘기는 그 손가락에 힘을 실어준 정도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손가락의 힘은 위대하다. 두꺼운 경전을 완독하게 하고, 완독한 경전이 신의 명령이라도 내린 것인지 주구장창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그리듯 외국어 단어를 반복해서 쓰도록 한다. 죽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다. 게다가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밥을 먹는다. 언젠가 내 눈엔 위험천만하게만 보였던 바로 그 젓가락으로.
동생에게 물었다. 죽기 전에 가장 먹고 싶을 것 같은 음식이 뭐냐고.
"스시."
"스시가 그렇게 좋아?"
"밥과 회가 한 입에 쏙 들어오잖아."
"그게 뭐?"
"귀엽게 생겼어. 귀엽게 생긴 주제에 맛도 있으니까 기특하지."
"그렇긴 해. 맛있지."
"시큼한 밥이랑 생선 맛이 재미있어."
언젠가부터 동생이 있는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스시 뷔페를 가기 시작했다. 실컷, 배가 터지도록, 귀엽고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 흰 접시 한가득 알록달록한 생선살이 쌓인다. 시큼 달달한 배합초에 절여진 쌀뭉치는 생선의 느끼함과 비린맛을 날려준다. 새로운 초밥이 입 안에 굴러들어 올 때 락교 한 알이나 초생강 한 점이면, 입안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 상쾌하다. 계속해서 최고의 맛을 느끼며 뱃속에 스시를 들이부은 날, 동생과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매달 '죽기 전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있는 셈이다. 호화로운 삶이 아닐 수 없다.
첫 책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의 북토크에서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삶'을 설명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잘 죽고 싶은 사람'이에요. 언제 내 인생이 끝나더라도 가뿐한 상태로 죽으려면, 매 순간 욕심 없이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인생의 선배들을 보며 느꼈어요. 그걸 특히 실감하는 때가 잠들기 전, 혼자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을 때죠. '죽으면 이보다 더 캄캄한 암흑이 찾아오겠구나', '캄캄함 가운데서 의식을 잃겠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숨이 넘어가는 그때 의지할 ‘삶의 행복한 순간, 행복한 풍경’이 떠오르지 않으면 너무 무서울 것 같더라고요. 최대한 내가 편안함을 느끼고 안락함을 느끼고 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삶의 풍경을 잘 기억하고 싶어요. 그런 기억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죽음에 이르는 순간 어둠의 등불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말하는 그 장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게 사라지지 않을까요.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담고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작별할 때 덜 무서울 수 있도록."
일상의 모든 것이 날 기만하고 위협하는 덫과 칼처럼 보여도, 실은 그냥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묵묵하게 견디고 있는 존재들일뿐이다. 책상은 책상, 통조림은 통조림, 젓가락은 젓가락, 너는 너, 나는 나. 삶 자체도 그냥 뷔페다. 위장에서 그저 죽처럼 녹을 뿐인 화려한 음식들처럼 우리의 하루가 놓여있다. 결론은 똥과 죽음으로 끝날 삶을 저마다 자기만의 접시 위에 얹는 것이다. 내 접시를 굳이 누가 가로채더라도(그도 나와 같이 접시를 채울 수도 있을 텐데) 우스운 일이니 웃고 다시 접시를 채우면 된다. 알아서 허기를 달래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돌아다니고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그러다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이거 맛있더라.', '그건 상태가 좀 별로인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광어지느러미 초밥이 나왔어. 얼른 가봐.' 하고 말해주기도 하면서.
그러니 동생아, 매일 손끝의 힘으로 일어서는 거야. 내 말 기억하지? 그냥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발가락에게 '하이' 인사부터 하라 했잖아. 넌 그때 해괴한 소리라며 웃어버렸지만, 죽기 않기 위해 딱 그 정도의 힘만 내어보는 거야. 손가락을 움직여 경전 한 바닥을 넘기고, 되든 안 되든 그림을 그리는 거야. 외국어도 되는 대로. 밥은 꼭 챙겨 먹고. 매일이 스시 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를 침 고이게 만드는 인생의 신맛은 늘 있어. 누나도 죽을 때까지 죽지 않을게. 부디 함께, 많은 곳을 누비자.
[인생의 신맛]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만이 넘치는 것 같다.
과연 정말 삶이 달고 쓸 뿐일까?
신맛을 곱씹은 사람이 많아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신맛은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다.
산미 있는 원두로 내린 커피가 있다고 했을 때,
누구는 그 맛을 풍부하고 향기롭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누군가는 시큼하기만 해서 커피답지 않다고 느낀다.
신맛은 다른 미감에 비해 개인의 경험과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 감각인 것이다.
쓰고 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신맛을 음미하듯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삶을 맛보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맛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얼굴을 좋게든 나쁘게든 찡그리게 만든다
2. 코와 혀의 감각이 놀란다
3. 관련된 향기가 이어서 떠오르는 등 상상력을 자극한다
4. 중독성이 있다
5. 싱싱한 것에서도 썩은 것에서도 신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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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도 상큼해도 인생은 인생.
인생의 신맛이 지닌 스펙트럼을 드넓게 경험할수록
나는 어쩌면 축적된 편견과 단순한 호오 너머의 '나'를 발견하는 법을 깨우칠지도 모른다.